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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슬슬 대학교때로 넘어가 볼까

대학을 선택하는 길로에 있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내린 결론은 역시
일본어로 먹고 살자!

학교이름따윈 어찌되도 상관없어! 하고 배재대와 한남대 그리고 우송대의 일본어관련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결과는 좋았다. 합격통지서가 오고...한남대는 떨어졌지만 ㅋ

어느 대학을 갈까 고민하던 때, 우송대의 창설학과
국제유학부의 일본유학과에 감명을 받았다. 2+2제도
2년 한국에서 공부하고 2년은 일본자매대학에서 공부한다!
다른 대학도 알아봤지만 기본적으론 3+1제도가 많았다. 그리고 그건 유학이 아니고
[연수]였다. 당시 상황에 우송대의 매력은 컷다.
일본의 어떤 대학일지가 제일 궁금했지만 그것에 대해선 자세히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학홈피가 대체 어케되어있는 건지-_-

난중에 알게된것은 현재 유학제도가 체결되어있는 학교는 일본나고야의 여자대학교!

남자는 안된다는 거~
장난하나ㅡㅡ
학과장 한교수는 어차피 남자들은 군대가는 거 유학가기전에 군대간다고 1년휴학하겠지?
이런 심보로 남자학교는 계약도 안되있는 데 일단 학과개설했단다...
어이상실.
개중에 2학년까지 마치고 군대간다는 얘들과 군대보다 유학먼저 가겠다는 얘들이 나오는 바람에
이런 정보가 우리에게까지 알려져버렸다.
결국 남자들은 강제적으로 휴학을 하게되었고, 군대를 가게 된다.

물론 갔다오니 하고로모국제대학이 계약되어 있어서 이쪽으로 오게되었고.

하지만 당시 원래 난 일본은 역시 실버사업! 복지사업이지...!!
하고 유학을 가려고 할 때 학교측에서 내걸은 8개의 대학이 있어
그중 현립대학으로 복지학과가 좋아보여 그곳을 가려했지만 불가판정이 떴다...
현립은 우리나라의 공립같은 거다. 한마디로 싸고 좋은 학교...
헌데 복지학과를 갈라면 2학년때부터 우송대학교의 복지관련학점을 땄어야 됐었다나
ㅡㅡ
그걸 왜 어디로 유학갈껀지 정할때 말해주는 데...
참 대책없다. 같이 공부를 하던 은애란 친구도 이쪽으로 갈라구 했는 데 퇴짜당하자
이길이 내길이 아닌거 갑다하면서 딴학교에 편입했단다..;;
참나.이런 정보는 처음부터 알려줘야하는 거 아닝미?

결국 내가 선택할수 있는 학교는 하고로모국제대학뿐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오게되었지.

뭐 암튼 대략 이게 학교에 대한 불만이었고 ㅋ

대학교에 와서도 나의 일본어는 빛을 바랬다. 고등학교까지 놀면서 공부한게 효력이 있었는 지
그 실력으로 입학한 얘들중에 기본실력이 다른 2명중 한명이라는 평판을 듣게 된다.
하지만 난 곧 타락의 길을 걷게 되지
공부는 뒷전. 벼락치기공부.
그것보단 술자리를 좋아하고 놀기를 더 좋아라했다.
그리고 여자도 좋아라 했다는 거-_-
그렇게 이 여자 저 여자 찝쩍대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 절친은 나보고 문어발식 연애경영이 너의 문제야..라고 하더군ㅡ,.ㅡ
그럴작정은 아니었는 데 어찌 그리되대?
뭐 이런 저런 이유로 난 공부를 안하게 되지만 기본실력이 있기에 성적이 좋았다.
당시 또 한명의 절친은 나보고

같이 놀았는 데 왜 너만 성적이 좋은 겨-_-

이런 말을 하더군ㅋㅋ


대학 입학했을 당시, 1기생이라 선배가 없었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점도 있을까? 구심점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뭉쳐지질 않았다. 그중 한명이 나서서 구심점의 역활을 하려고 했고,
그를 중심으로 7명이 뭉쳐다니게 되었다. 나는 그 중 한사람이었다.

그게 칠성사이다 그룹의 시작이다-_-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 7명은 칠성사이다 불리고 있었고
남녀성비가 5:2였는 데 여자 두명이 남자 5명끌고 다닌다고 여자들사이에서도
엄청 말 많았다 하더라.
참고로 알다시피 어학계열은 여자가 대부분이다보니 남자가 부족하다.
우리는 그래도 좋은 편.
여자20명에 남자10명.
그렇다고는 해도 남자의 반을 여자 2명이서 끌고 다닌다는 느낌이었으니
질투하는 건 당연한 거겠지?
더큰 문제는 구심점이 되던 아이가 그룹내 여자중 한명에게 관심이 있어 호감도 얻고
여자의 방어벽을 풀기위해 만든 그룹이란 성격이 컸는 데
그 여자를 그룹내에 있던 다른 남자가 재빠르게 채갔다는 거지....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불쌍한 녀석ㅠ 당시 구심점의 아이는 멋도 모르고 고백을 했다가
이미 사귀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배신을 당했다며 울던 게 기억난다.

게다가 나중에 알고보니 그 그룹에 속해있던 남자 3명이 한꺼번에 그 여자한명한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던 거였다-_-
어이가 없어서리..여자가 얼마나 이쁜겅미?
미안하다...얼굴은 괜찮았는 데 가슴이 너무 작아서 난 별로였다...-_-;;;;;;
가슴은 중요해.

세월이 흘러 난중에 이런저런이유로 그 여자와 동거를 한적이 있는 데 참...
얼굴도 화장빨;; 무슨 상처투성이에 주끈깨투성이..
화장두깨가 1센치더라 난 정말 속았어;;
원래 여자 쌩얼은 다 그런가? 난 지금까지 환상속에 있었나? 했다ㅡ.,ㅡ

뭐 암튼 제일 대박인 사건은 구심점아이와 한번사귄아이는 그렇다고 하지만
좋아한다고 표현도 안하고 있던 아이가 문제였어.
여자는 원래 구심점아이는 관심이 없었고 사귄아이와 표현안한아이 둘 중하나를 놓고
고민중이었다네.
사귄아이가 고백해오자 덜컥 사귄거구.
표현안한아이는 표현을 안하니까 날 좋아하는 지 어떨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내비둔건데.

나중에 그 아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이 여자는 흔들리지.
그래. 양다리여...ㅡㅡ;;

사귄아이와 여자는 결국 헤어지고 여자는 표현안한아이와 사귀게 된다.
...라는 게 문제가 되어 여자는 걸레 남자는 친구의 여자를 뺐는 호로자식이 되어버린겨.

나중에 듣고보니 어느대학이나 이런 이야기 한두개씩 있다네.
역시 남녀칠세부동석이여ㅋㅋ

여기서 여자와 남자가 더 욕을 먹게되는 건 그걸 부정하고 있었다는 거야..
자신들은 사귀고 있지 않다는 것...
넵...논점은 그거였고 그들은 우리가 증거도 없이 사귄다말을 해댄것으로 알고 있어
그러니 당연히 부정하는 데 믿어주지 않는 우리들이 야속했었겠지.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증거를 몰라.
그러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욕을 한것은 사실 그들에게 나쁜짓을 한거라 생각하지.
증거도 없이 마녀사냥한 셈이 되었으니.

그러나 증거가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은 어떨까?
..그래 당시 그 증거를 공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4명있었고, 그것이 문제가 되었지..

사실 주변인인 우리들 입장에선 지네들이 사귀던 말던 상관없던 문제였어..
나도 물론 마찬가지였고.
허나 우리가 싫었던 것은, 왜 떳떳하지 못하냐 지레 겁먹고 있냐.
왜 거짓말 하냐-_-;; 라는 항목이었지. 떳떳히 말했으면 상관없던걸
숨기니까 거짓말이 되잖아? 그리고 그 거짓말을 숨기기위해 또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그게 더 커지고..그래서 싫어지드라.

그리고 우리 주변인들은 니들 사랑문제랑 관련없다 해서 그냥 적당히 지내고 있었는 데
지래 우리가 자기를 싫어할꺼라 생각했는 지 참...태도가 개같더라구
그래서 결국 그 넘과 인연을 끊게 되었네.

난중에 여자와 같이 살때 술마시며 이야기 해보니 내 생각대로 더구만.

내가 좋아하던 아이는 결국 짝사랑으로 고백도 못하고 끝나게 돼ㅎ
못하겠더라. 뭐랄까 나에겐 여신이란 느낌이었어. 만지기에는 너무 눈부시고 멀어.
지금생각하면 그냥 용기가 없던 거죠~;;

집안은 뭐가 어찌되고 있던지 이 당시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냥 정육점을 하고 있고 아버지한테 어머니가 정육점을 말아먹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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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역시나 다를까 꼴찌다 꼴찌다 꼴찌
그러나 생각과 달리 나와 같은 아이들도 꽤 있었는 지 40명중에 35등...
그렇다 내 밑에 5명있었다.-_-
전교등수는 더 좋았다 밑에 200명정도 있던 기억이 있다.

허나 반에서 꼴찌계열에 들어간건 생각대로 였고 혹시나 역시나 공부가 싫었고 하질 않았다.
고2가 될때 인문반이나 실업반이냐를 고를 수가 있었다.
주로 실업반을 가면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고 소위 취직이 잘되는 쪽 대학학과를 가게 된다.
인문반을 가면 주고 국어와 사회를 공부해서 소위 취직이 어려운 쪽 대학학과를 가게 된다.

난 고민할 가치도 없이 인문반을 택했다. 이때는 특별히 부모님은 나오지 않으셨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IMF터지고 부모님도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인문반에서의 좋은 점은 일본어였지.

(중간중간이야기가 빠지네..-_-)

내가 일본어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때다. 당시 고등하교를 진학한 형이 그림질을 한다고 할때 애니메이션 선진국인 일본의 문물을 많이 가져왔었다. 공부를 목적으로.
난 그걸 그냥 단순 취미 생활삼아 보게된 게 계기다.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노래였다.그 애니메이션의 주제곡.
노래가 너무 좋았고, 난 단순히 따라부르게 된것이다.
단순히 좋아서... 노래의 한국어번역가서를 찾아 외우고 노래를 외우고.
그러나 아이우에오 쓸줄을 아직 모르고..
내 느낌은 놀고 있는 건데 이게 나중에 공부로 이어지더라.
고등학교에서 제 2외국어로 일본어와 독일어를 선택할 수 있었다. 당시 대세는 독일어였다.
왜냐구? 그때까진 아직 일본보단 독일이었거든
게다가 제2외국어로 점수딸라구 하는 것 뿐이니 영어가 되는 친구들은 당삼 독일어지
비슷한게 많으니 점수따기 쉽거든.
뭐 자기가 배우고 싶으니...라던지 앞으로 어느나라가 잘 될것 같으니...하는 마음은 없어.
오로지 점수. 이것이 고등학교의 방식이야.

간단하게 당시 나의 상태를 설명하자면.
2학년때 반선택시

공부잘하는 녀석들은 실업반
공부못하는 녀석들은 인문반 <- 나

인문반에서도
공부잘하는 녀석들은 독일어반
공부못하는 녀석들은 일본어반 <- 나

그래...대전대신고의 최하 클래스에 들어갔어
그렇게 들어가자 반에서 중간정도하는 아이로 성장했다-_-
난 그대로였는 데 주변아이들이 변했다고 밖에 말이 안되지ㅋㅋㅋㅋㅋㅋㅋ

여기서 난 자칭 일본어특기생으로 활약한다.
교내일본어대회에서 1등상을 탔으니 뭐 대신고에서 나보다 일본어 잘하는 녀석이 없었다는 거고
수능도 당당히 만점.

어떻게 공부했냐고? 공부안했어.
그냥 놀았는 데 되드라-_-;
사실 이렇게 했으면 난 서울대도 가능했을꺼야...-_-
그래 중학교때부터 그냥 애니메이션 주제곡이 좋아 외웠던 것이 고등학교2학년때 히라가나 아이우에오를 배우면서 특출하게 변했다.
딱 히라가나랑 가타가나만 외우니까 교과서에 있는 단어 다 아는 단어더라;;
평소 노래에서 나오던 구절이 왜 이런 방식으로 연결이 되는 지에 대해
선생님이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고. 남들은 문법이다 뭐다 하며 외우고 있을때

난 그냥 문장을 한번 읽어보는 것만으로 어느 문장이 맞는 문장이고 어느 문장이 틀린 문장인지가 보였다. 그래. 그냥 보였다.

하지만 당시엔 왜 맞는 지 틀렸는 지 설명하라 그러면 좀 어려워했지만
알다시피 객관식의 문제가 주류고. 학교시험도 어렵지 않잖아? 어차피 범위 다 알려주고 그 범위밖에 안나오는 데 단어는 다 알고 있겠다 문법도 쉽겠다
외울꺼라곤 한자밖에 없지.
근데 그런 주관식은 선생님이 힌트많이 주잖아??

그리고 당시 일본플스게임[유희왕]에 빠진적이 있다.
카드게임이지. 플스로 있었다. 난 이 화면을 프린트해가서 야자시간에 해석했다.
야자시간은 참 억지로 붙잡고 있지만 공부하긴 싫고 시간때우고 하던 시간.
나에겐 참 도움이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유일하게 이거 해석할때는 시간 잘갔다.
좋은 킬링타임이었지.
헌데 이게 또 나중에 도움이 되었네ㅎ 그냥 난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던 거였어.
마음은 놀았을 뿐인데.

 

중3때쯤에 IMF가 터졌다.
당시 내가 기억하던 것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노래방 건물에서 살인사건이 났다.
아버지가 3층인가 했는 데 2층에서 살인사건이 났다나?
결국 원래 보증금이나 물건값받고 나와야 할 수순인데 한푼도 못 받고 쫒겨나왔단다.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비디오대여점은 경영상황이 나빠졌다.
당시 한개 1500원~2000원에 빌려주던 비디오가 500원으로 거품가격이 없어지고 폭락했다.
협회의 결정은 따를수 밖에 없는 설정이었나?
암튼. 매출과 영업이익은 약 6분의1정도로 떨어졌다.
하루매출이 약30~50만원의 가게였는 데 약5만원으로 떨어졌다.
당시엔 어려서 잘 몰랐다 가게를 보고, 매출을 내눈으로 확인하고 있었지만
하루매출 5만원으로 떨어진것을 보고 진짜 장사 안되는 구나
생각은 했지만 사실 5만원씩이면 한달에 150만원.전기세 집세 내고보면 손에 남는 건 쥐꼬리.
하지만 있긴 있었다는 거지? 신작비디오도 사서 놔줘야 했지만 완전히 죽은 사업은 아니었는 데

문제는 어머니였다.노이로제다.
비디오대여점이 알다시피 손님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이다.접객은 필수다.
어머니는 그것에서 오는 노이로제로 더이상 비디오대여점을 운영할수 없는 상황에 빠지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싸우셨다.
어머니입장에서 최소매출액 30만원이면 한달에 900만원이다.물론 전기세 집세등이 빠지면 영업이익이 어떨지 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매출액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
매달 매출액이 1000만원인 가게.
어머니는 이걸위해 버티신거지만 매출액이 줄었는 데 버티고 싶냐고? 아니올시다.
그럴꺼면 전부터 자기가 하고 싶던 일을 하고 싶단다.

그게 정육점이다.외삼촌을 만나 눈독을 들이던 정육점.
어머니는 왜그런지 정말 하고 싶어 했다.
약 1년여 공방끝에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으로...집으로 데려온다고 말하며 따라나갔다.
형은 이쯔음하여 군대를 갔다.
난 집에 혼자남았다.고등학교2학년과 3학년은 그렇게 혼자 집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생활비 명목으로 매달 20~30만원정도 부쳐주시던 기억이 있다.
사실 학비와 급식비가 큰 명목으로 군것질은 조금 할수있을 정도의 넉넉함도 있었다.
난....급식비를 내지 않고 학교에선 굶었다.
이 돈으로는 시디를 사서 구웠다;;;;;;;
2~3주에 한번씩 아버지가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냉장고에 넣어주셨고 난 그 음식을 먹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나의 고등학교는 생활은 형이 군대에서 돌아오면서 끝이 난다.


아 형이 궁금할 것 같은 건.
우리집 매출액일까?
저 돈이 어디에 갔는 지?ㅋㅋ

사실 아무리 발로 운영을 한다고 해도 알바생도 없이 어머니와 우리형제가 가게를 돌렸잖여?
근데 영업이익이 낮을 턱이 없지?
그 돈은 아버지가 개인적인 일에 쓰셨어
친구들 결혼한다 자식 낳았다 축하금을 기본 백만원씩 부쳤단다.
자기 잘된거 자랑하고 싶었겠지. 니들한테 이렇게 뿌릴 정도로 벌고 있다 자랑하고 싶었겠지

그리고 대박

아버지의 절친분이 암에 걸리렸대.
헌데 아버지 옛날이 어땠는 지 내 전글을 보면 유추할 수 있겠지만
친구들은 대부분 공장일같이 하던 때 잘 못 사는 사람들이 많어
돈없는 분들이지.
결국 돈없이 치료도 못 받고 돌아가실분을 보고 측은지심을 느끼신 건지


아버니는 그 친구분의 치료비를 전액 지급했다.

금액은 약 3억정도 된다더라.(이건 입소문이니 정확한 금액은 모름)

-_-
그 친구분의 자식은 우리아버지를 친아버지보듯한다던데..

참 통크신 분이여.존경스럽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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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대신중학교에 입학은 뺑뺑이였다. 당시 부모님은 대전대신고에 들어갈 확률이 커졌다하여 기뻐했었고 난 단순히 형과 같은 학교에 들어갔다고 좋아라 했었지ㅎ

좀 나중이야기지만 뭐 말나온 김에 써볼까ㅎ
당시 형은 3년차이인지라 내가 중딩이 됨과 동시에 고딩이 됬다.
주변의 평판이 안 좋은 비인문계가 가서 부모님이 크게 실망을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중3때 북고와 대신고, 그리고 충남기계공고를 놓고 고민을 했었을 당시, 부모님은 대신고를 가라고 그렇게 성화였다.
형도 나랑 거의 비슷한 점수대였기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북고를 선택했다고 하는 데 그게 그렇게 못마땅했다고 너만은 대신고 보내겠다 성화셨다.


님하 제발...형일은 형대에서 끝내지 왜 나한테 뭐라 그러는 겨...ㅠ

갠적으로 젤 가기 싫었던게 대신고였다.

사실 가고 싶었던 것은 충남기계공고..당시 충기라 불리던 공업고등학교인데, 우리지역에서는 공고중에 제일 쎄다는 소문으로, 인문계 갈 성적의 아이들이 공고를 지향할 때 이 학교를 선택한다 하니 성적면에서는 다른 학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주변의 평판이었다.

난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공부가 싫어지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4~5학년이 되면서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던 사람이다.
뭐 그렇다고 대놓고 안하고 놀기만 했던 것도 아니고 벼락치기 공부 정도는 했었다.
(시험 직전에 친구들이 공부하는 거 보고 같이 조낸 외우거나 했었다...-_-)
부모님이 시켜주시던 것은 눈높이교육이라는 학습지. 마냥 꼴통만은 아니었는 지 성적은 언제나 그럭저럭. 반에서 중간정도는 했었다. 아니...딱 중간이었다;;

그렇게 초딩생활과 중딩생활을 마치고 나니 돌아온것은 갈림길에서의 망설임.

인문계인 대신고를 가자니 불보듯 뻔하다. 꼴찌다.
대신고에의 턱걸이수준 합격라인은 간신히 맞췄다. 뺑뺑이로 다른 인문계에 떨어질 확률이 조금은 있겠지만 집주소도 정림동에 대신중출신...이것만으로 대신고 넣어서 떨어질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게 당시 선생님의 설명이었다. 선생님도 대신고에 들어가는 것을 추천했었다ㅠ

공부가 싫던 당시엔 너무나 싫었다 다들 대신고 대신고.
대신고간다고 서울대 가는 넘은 가지만 난 아니라구-_-
공부할 맘도 없는 데ㅠ

뭐 암튼 충기가고 싶다는 내 말은 그냥 씹혀졌다. 형이 다니던 북고도 가고 싶은 마음도 1퍼정도 있었지만 정말 열성적으로 반대당했다;;

이론은 좋았다 생각했는 데.

충기를 가면 고딩때부터 돈 벌수 있다. 정식적으로는 고등학교 졸업후에 바로 취직전선에 띄어들 수도 있고, 진학반으로 들어가 대학으로의 진학도 꿈꿀수 있다. 충기라는 이름이 빛날테니 공업쪽 학과라면 문제없겠지 하던 마음도 있었고. 당시의 선택은 충기가 젤 좋다생각했었고.

북고에 들어가면 반에서 일등은 하겠다. 비인문계다 인문계를 떨어진 얘들이 공고나 상고가기는 싫고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성화도 있고 해서 선택하던 게 비인문계다. 허니 턱걸이 수준이라고는 해도 인문계 갈 성적이 되던 내가 북고에 가면 틀림없이 전교10등안에는 들겠지? 하는 마음.
아무리 빡고라 불리며 무시당하는 학교라 해도 전교등수에서 놀면 대학도 충분하겠고..
하는 마음가짐도 있었다.

그리고 대신고를 선택할 시는 꼴찌다 전교꼴찌 레벨일테다.
아무리 우리지역에서 유명한 대전대신고의 이름이 빛나도 전교꼴찌레벨을 누가 좋아라 하겠는 가...나의 이론이었지만, 묵살당했다.
그렇게 부모님과 선생님의 모종의 합의하에 대신고에 넣게되고
난 당당히 합격하게된다ㅠㅠㅠㅠㅠㅠ

 

대신중에서의 기억은 체육복으로 통일된다.
난 항상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내복대신 체육복을 입고 있었지.

요전글에서 밝힌바와 같이 당시의 나는 우리집이 남들보다 잘 산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버지는 노래방 어머니는 비디오대여점을 운영하며 할부로 산거지만 집도 있었지.
집에 차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장애인에 색맹이었고 당시 법률로 색맹은 면허를 딸수 없었다.
(현재는 한정승인)

사실 이야기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슬슬 나오는 건데,
학교의 짱이 누구인가 등등
불량써클이 생겨나기 시작하던 나이다.
초등학교때는 이현진과 유흥상이 학교 짱의 대명사였다.
유흥상은 당시 몸집이 남달리 커서 혼자지만 쎄보였다.
이현진은 몸집은 작았지만 빽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시설에 있던 아이였는 데, 같은 시설에 있는 형들이 그 빽이었다.

그들이 하는 것은...그렇다 일명 삥뜯기. 돈을 가지고 약한자는 불행했다.
난 어떻게 항상 평범한 생활을 하고...(사실 부모님도 브랜드는 안사줬지)
현진이랑은 친하게 지냈던 것도 있었지.(짝꿍인 적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운좋게 그 초딩시절 학교짱들의 권력다툼과 세력다툼에서 빗겨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오면 초딩수준의 기싸움이 아니다.
학생들은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패싸움을 시작했다.
초등학교때는 배짱이 큰 자가 싸움을 이겼다.(우리학교는 그랬다)
중학교때는 시다바리를 많이 많들어 패가 많은자, 그리고 싸움으로써 그 정점에 오른자가 짱의 위치에 있었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마치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 하빌리스로 진화한 느낌이랄까-_-
각목을 들기 시작했다;
아이구 무서워ㅠ


그런 와중에서 난 우리집에 잘 산단하는 것은 숨기고 싶었다. 숨겨야 했다.
아니면 돈을 뺏기기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체육복을 입기 시작했다;;
형에게 물려입은 체육복에 학교가 시작하기 직전에 가서 주워온 체육복.
그리고 형이 주워왔던 체육복
형친구에게 받은 체육복
집에 체육복은 수두룩했다 내 기억엔 6벌이상 있던 걸로 기억한다.
난 어딜가든 체육복을 입었고, 겨울에는 내복대신 체육복을 입어, 가난한 집 아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연출했다.하지만 초딩때의 모습을 알고 있는 자들도 있어, 그렇게 완벽히 숨겨지지만도 않은 것이 결과였나...;;
뭐 아무튼 그렇게 나의 별명이 체육복의 [육복]이 되었다.

중딩때 하두 오락실을 다니던 나와 형이 애속했던지 형의 공부를 위해서 였던지(형은 디자인등 미술에 흥미가 있었다) 부모님은 적금을 깨서 200~300만원정도의 컴퓨터를 사줬었다.
이때부터 컴퓨터의 흥미가 생겼고..
당시 중1때. 아직 한국에 스타크래프트가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피시방도 보급이 안되었던 시절에 그 당시 새로산 컴터에 데모판이 깔려있었다.
멋도 모르고 플레이하던 나. 즐겁게 혼자 놀았는 데 갑자기 중1끝날때쯤에 스타가 보급이 됐다 급작스럽게 작은 동네에 5개나 되는 피시방이 오픈했다;
피시방에선 모두모여 스타를 했다.
당시 내또래에서 스타를 전부 처음하는 아이들뿐이었고, 난 컴터로 데모판을 몇번이나 플레이했었다. 물론, 정식판이니 조금 다른 점은 있었지만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학교 스타짱의 자리를 얻었지-_-;;

당시 친구들의 수준은 조낸 돈 모아서 캐리어를 뽑았는 데 왜 공격을 못하니? 이거 수송기니?
이런 레벨이었으니 할말 다 했지 머.
최고렙을 본것도 있고 우리집에 컴터는 있었지만 인터넷은 안됬다. 스타를 하기위해선 피시방에 가야했지만 나에게 그런 돈은 허락되지 않았다.연습이 되질 않는 거죠~ㅎ
결국 학교스타짱의 자리는 몇달되지않아 저멀리...ㅡㅡ;;지금도 내가 스타를 잘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이른다 개나소나 다 하게되는 중2~3때의 나의 평판은 그냥 그럭저럭하는 얘 정도의 인식.

당시 우리집은 인터넷이 안됬으니 인터넷이 되는 친구집에서 여러가지 부탁할 만한 것이 많았다. 좋은 방향으로는 프로그램.유틸.게임.
조금 나쁜 방향으로는 야동.야사.야겜,야설등등..
중학교때라 워낙 그쪽으로 발달하던 때라...난 친구를 이용하여 나의 성욕을 충족시키려했었다.
허나 그 친구가 공짜론 안된다네..
난 친구 좋다는 게 뭐냐머 친구한테 무슨 돈을 달라그러냐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허나 되려 설득당했다ㅡ,ㅡ
그 친구왈
니가 그런말을 한다면 너도 니네집 비디오 공짜로 빌려줘야하는 것 아니냐-_-
...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말이지만 그당시 어리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결국 나는 그 친구에게 갈때마다 비디오하나씩 공짜로 빌려주고
그 대신 그 친구는 나에게 여러가지 자료들을 공짜로 주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뭐 중학교3년 같이 지내고 저 친구와는 절교했다.
결국 너무나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건 나와 맞았다고 생각했는 데
자기중심적인 것은 나와 안맞았기에 절교하게 됬지.
문제는 영웅전설3 하얀마녀의 포스터였다.
당시 게임잡지 부록으로 이런 귀한것이 달려왔다. 당시 이 친구는 나보다 더더더더욱 기대했었고 복사하는 것 뿐이므로 사자마자 바로 하루 빌려주고 다음날 받기로 되어있었다.
허나....게임잡지가 돌아왔을때 포스터는 사라지고 난 후였다.
난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몇일이 지나 또 다른 친구가 왔을때 그 잡지를 보고
자기가 정말 좋아한다고 포스터 달라구 포스터 없냐 말해왔고 난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선심쓰듯 좋다고 했지만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지. 그 친구가 이미 먹었으니.
결국 또 몇일이 지나 그친구집에 가서 해명을 요구 했다.
그 친구왈 [말할려고 했는 데 타이밍이...]
난 그친구가 말만 했었어도 별 생각없이 줬을 터였지만 아무래도 그 친구는 나에게 말을 안한것이 화근이 되었다 당장 달라고 하고 사과하라며 분위기가 냉랭해졌지.
당시 그 친구가 한 행동은 그 포스터를 찠었다.
우리의 사이가 이렇게 된건 포스터야 그러니 이 화근거리를 없애자..


장난하니? 그거 내 꺼거든??????
그날로 그를 안 보기로 맹세했다
난중에 그 친구는 똑같은 잡지를 사서 나에게 주려고 했지만 당삼 난 안받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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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모교 하고로모 국제대학.
난 이 대학 때 안좋은 기억밖에 없으므로 좋아하진 않는 다.
학교는...대전대신고보다 작았고 단지 일본에 있을 수 있게 해준것...
아니 알바를 할 수 있게 해준것에만 감사한다.
수업은 질적으로 안좋았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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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교.
대전대신중학교와 대전대신고등학교다. 이곳에서 6년을 썩었다.
저렇게 보면 배경 죽이지만 저 가을...은행의 똥냄새에 코가 막힌다. 지각해서 얼차레라도 받는 날에는 정말 죽을 것같아.
겨울 풍경도 조낸 좋아보이지만 사실 저게 엄청난 내리막길&오르막길이다.
뭐냐구? 여차하면 미끌!
부모님은 저 학교 진학율이 좋다고 그렇게 가라고 추천해서 갔지만, 난 6년간 썩었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그 당시는 현실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 그나마 알려진 학교라니 나의 미래에도 도움이 되겠지
부모님은 타당해...란 생각도 헀지만
이제와서 생각하면 저 학교간다고 잘 된다는 거는 없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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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이야기에 나오는 레고로 만들어 가지고 놀던 사진 ㅎ
앞줄에 있는 로봇만들었다고 좋아라 했었다.


동아전과 겁나게 그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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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어린 시절 난 참 행복한 아이였던 것 같다. 복에 겨웠지.

어린 시절을 보내던 나날, 내가 7살이 되어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현재까지 이어지는 터전, 정림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처음 정림동에 왔을 때 난 마냥 기뻐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고 유치원에도 가고...무엇보다 가게가 컸다 ㅡ,.ㅡ
(당시 어린 눈으로 봤을 때 큰거지. 현실적으로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와서 새로이 윤영일이란 사귀게 되는 데 그게 또 나쁜 넘이었네-_-
어렸을 때 일화가 있다.

그와 나는 왠지 모르게 친했다. 항상 붙어 다니며 놀러다녔고, 무엇보다 나이가 같았다;;
어느날 그는 나와 있을 때 집주변에 잘 세워져있던 자전거 바퀴의 바람을 빼기 시작헀다.
뭐하냐 묻자 그는 바람빼놓고 도망가기 놀이라며 재미있어했다. 난 덜컥 겁이 나 어린나이에 도망가야 겠다고 생각했고,
그와 함께 그자리를 빠져나왔다.
몇일이 흘러 부모님이 내가 옆집자전거의 바람을 뺀걸 누가 봤다며 다그쳐왔다. 난 당당했다. 옆집 얘가 헀음 이런 일이 있었음 하고 꼬질렀다 ㅡ.ㅡ 그걸 듣자 부모님은 다시는 그 아이와 놀지 말라고만 하고 얘기를 안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넘이 날 꼬질렀단다...;; 봤다는 사람은 그니까 그 친구였다는 이야기고, 그집어머니가 우리 어머니에게 따졌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 일 이후 나드리집이랑 우리집이랑은 원만하게 생활하진 못한것으로 알고 있다.

약간의 여담일까. 누구나 하는 생일 파티. 우리집은 한번도 내가 기억하는 생일파티를 한적 없을 정도로 빨리 없어졌다. 주범은 형의 친구. 당시 형의 생일 파티에 초대한 친구중 한명이 우리집의 돈을 훔쳤다는 거고 그 이후 우리집은 생일 파티가 없어졌다. 당시 어린 내가 기억하는 건 이것뿐이다.

암튼, 유치원가는 첫날은 나는 마냥 들떠있엇고, 부모님은 형을 한 번 보냈었으니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뭐 형이랑 같은 명화유치원이었고. (형은 한참전에 졸업했지만! ㅋ) 여유를 가지고 차를 놓쳐버려 아버지가 유치원까지 날 데려다 줬다 ㅡ,.ㅡ
뭐 당시 기억에 아버지는 유치원버스를 태우려고 준비는 잘 했었지만 이 버스가 그 버슨지 몰라서 놓쳐다는 거다.

유치원 생활때, 나는 마냥 부끄러운 아이였다. 무엇이 문제냐구? 낯을 가리는 것도 있는 데 여자란 동물이 있네...
역시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싶다. 7세가 되기전에도 여자랑 놀았었다는 데 그 기억은 전혀 없는 데 왜 이 당시는 여러가지로 부끄러운 아이였다는 기억은 있을 것일까.
뭐 그렇다고 해도 좋아했던 건 또래 7살짜리 얘기들이 아니구, 유치원 선생을 좋아했었다;; 기억에 남는 건 유치원선생이 유치원생 모두에게 오늘은 선생님 얼굴에 뽀뽀를 하고 집에 가자~! 란 테마를 진행하신적이 있는 데, 너무나 부끄러워 입도 못 갖다대구 코를 갖다댔다 ㅡ,.ㅡ 멍한 겅미...역시 어릴때는 연상의 여자가 좋은 것일까? (너무 연상이지만 ㅋ)


시간이 흘러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내가 살던 정림동에는 학교가 없는 관계로 옆동네인 복수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지.
난 언제나 항상 거의 혼자서 걸어다녔던 것 같다. 형이랑은 3년 차이가 나니  뭐 학교 시간이 많이 다르다는 거야.어쩔수 없었다.
1학년때 나는 우수한 성적의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요령도 나빴다. 교과서는 수업이 없어도 전 과목 다들고 다니는 게 당연한 거라고 믿고 있었다.
허나 왠지 모르게 성적은 우수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한테 칭찬을 받으며 살았던 기억이 있다. 허나 조금씩 삐뚤어져 가는 마음도 있었다. 형은 당시 속셈학원에 피아노학원에 뭐 별에 별거를 다 배우러 다녔었던 것 같다. 난 항상 자습이었다.....
당시 속셈학원에서 진행하던 스키여행에 나도 같이 따라가서 형과 놀았던 추억이 있다.
뭐 공부 할 마음도 없었고 놀고만 있던 기억이 있다.
멀리도 않은 거리를 매일 편도 한시간이 넘게 걸리던 기억이 있다. 뭐 어릴때니 속도가 느린 건 어쩔수 없지..

2학년으로 올라갈때쯤에 드디어 우리동네에도 초등학교가 생겨 갑작스럽게 이동이 되었다. 집이 정림초등학교에 가깝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오게된 정림초. 학년을 지내면서 꼭 한명씩 친한 얘를 만들고 거의 그하고만 놀았던 것같다. 2학년때 윤큰별 3학년때 박재민 4학년때 노승주 5학년때 정상화(이하 메바) 6학년때 수두두룩 ㅋ 4학년때까진 인간관계를 그렇게 깊게 쌓질 않았는 지 아니면 원래 저학년때는 그런건지 학년이 바뀌면 곧 바로 조낸 친했던 인간관계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만났을때는 [아 X학년때 친하던 얘]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더라. 뭐 지금 생각해도 예전에 뭘 하고 놀았는 지 조차 기억도 안난다.
이 당시 형이랑은 항상 장남감을 가지고 놀았었다. 나의 메일딜러는 항상 여기였다.
당시 유행했던 다간 선가드 등등 학교앞 문방구에서 닥치고 사들였다. 형은 장난감 외에도 만화책을 그렇게 모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당시 유행했던 학종이로 학은 안 접고 장난감을 접었었다;;
레고로 다간을 만들었다고 좋아라 하고 당시 사진도 찍었을 정도 ㅎ
헌데 다 버리셨다. 부모님이 우리가 항상 그렇게 놀고 있었으니 안 좋게 보였겠지. 뭐 형제 둘이 다 성적이 떨어진 것도 한 몫 했을껄.
만화책이 집에서 없어지더니 장난감이 없어지고 한참을 슬퍼하며 이런 곳에 돈을 투자 안하는 게 낮다는 교훈을 얻었다.

4학년때 쯤에 비오는 친구랑 싸우고 맞고 들어온 날이 있었다.
음...쫌 않좋은 가정형편의 아이였는 데 소위 말하는 불량학생. 이름도 기억 안나는 데 이 친구랑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같이 다닌 적이 있었다. 공부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4학년이 되어서 덧셈뺄셈을 못하는 주제에 컴퓨터를 배우러 다니는 아이였고 난 그를 따라 그의 학원에 살짝 살짝 동반을 한적이 몇번 있었다. 물론 거기 선생님이 안된다 했지만 당시 그의 막무가내는 통했다. 난 그와 함께 그의 컴퓨터 숙제를 돕거나 했다. 덧셈 뺄셈을 셈이 되도록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컴퓨터로 입력을 하는 문제였는 데 내가 하는 일은 항상 덧셈 뺄셈을 해주는 일이었다. 입력은 그가 했다.
입력이 끝나면 게임을 하며 놀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난 그게 목적으로 따라 다녔다.
그러는 와중에 체육시간에 처음으로 뜀틀연습이 있는 날, 그는 뜀틀을 넘다가 팔이 부러졌다;;
결국 당시 내가 집도 가깝고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나에게 그를 돕도록 부탁했다.
그의 집까지 가게 되고 열심히 했었지만 거기서 문제가 발생되었다. 난 그가 아픈사람이기에 선생님이 부탁하기에 도와줬는 데 그는 그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버린듯하다.
팔이 원상복귀했는 데도 그는 내가 도와주길 원했었고 난 그걸 거절했다.
거기에서 그는 날 자신의 시다바리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고 개긴다고 생각한 모양으로 싸우게 되었는 데, 뭐 싸운적이라곤 한 번도 없는 데 맞고 들어왔지-_- 당연한 거 아님?
나중에 듣기에는 그 집에 위자료를 청구했다나 말았다나 뭐 정확한 정보는 없다.
결국 그 일이 있고 싸재교육은 지금껏 형만의 특권이라고 알고 있었는 데 나도 받게 되었다.
그게 합기도다.

할머니의 생일 잔치가 뭐 화려한게 있다고 난 평생 할머니 얼굴도 못 보고 살았었는 데 할머니 생신잔치에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데리고 간적이 있다. 난생처음보는 친척들. 인사를 시켜주는 데 뭐 누가 누군지 전혀 몰겠고ㅋ
난 당시 무시당한 기억 밖에 없다. 날 바라보는 눈도 차갑고 말을 걸어도 쌩까고 인사시켜줄께는 잘만 인사했었던 사람들이...결국 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었다.

어느쯔음인지 기억도 안나지만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개명이 있었고, 우리 학교에서 급식을 취급하게 되었던 기억이 있다. 형은 안타깝게도 급식제도를 못 만났지만 나는 아슬아슬하게 먹었다.또, 아버지가 불법복제의 협의로 교도소에 한달정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어머니는 친척집에 갔다고 했지만, 학교에는 이미 우리 아버지가 잡혔다는 것이 신문에 났다고 다 퍼져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비디오대여점을 어머니에게 완전히 맡기다 시피하고 노래방을 개업한다.

이러한 당시에 5학년이 되어 메바를 만났는 데 이넘이 나랑 비슷한 점이 많았었다. 내가 형이랑 놀던 방식이랑 메바가 자신의 형이랑 놀던 방식이 거의 비슷하여 학교에서 같이 놀수가 있었다는 거지.
당시에 같이 다니던 녀석 한명을 꼬득여 항상 쉬는 시간이 되면 세명이서 게임을 하면서 놀았다.
또 이 당시에 난 오락실에 빠지게 되었고, 역시나 메바와 학교친구들과 오락실에서 살게 되었지.
초등생이 어디서 돈이 있나 모르겠지만 난 항상 부자였다. 우리집이 잘 산다는 것을 난 이쯔음에 알았다. 난 항상 부모님께 받은 용돈이 있었고 또 부족할때는 가게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적도 많았다.
내가 이대로 있으면 안좋은 일이 있으리라 생각을 하셨는 지 부모님은 우리집 옆집에 있던 오락실을 M&A하셨다. 벽을 헐고 오락실은 사라지고 비디오대여점이 커지는 순간이었지. 이후 나의 오락실 버릇은 줄어들었다....(없어졌다는 게 아냐 ㅋ)

이때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할머니가 죽기직전까지 계셨다는 큰고모댁에 가게된다. 대구다. 난 미국에 이민을 갔다는 큰아버지를 보게된다. 평생 처음이라지. 아버지는 남자중 둘째였다는 데. 그당시를 알수있게 해주는 큰아들과 그 외 떨거지라는 스펙의 차이인지. 아버지와 차이가 너무 났다.
난...이때 처음 아버지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ㅡㅡ;;
초등학교 5학년이 되도록 아버지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는 게 어이가 없지. 암.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었으니 난 대체 어떤 아이였던 거지 ㄷ
내가 친척들을 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인데 정~말 안 좋은 기억밖에 없다.
물론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뭐 분위기 안 좋은 것은 알겠어. 난 할머니라곤 인생에 두번밖에 본적이 없으니 슬프지 않은 것도 당연한 거 아님?
헌데 왜들 그리 차가운 겨. 어린 나는 배가 고팠고 당시 친척이라 소개받은 사람들이 열심히 부엌에서 음식거리를 준비하고 있었을 때이다. 난 배가 고프다 사정을 했을 때 돌아온 말이...
[니 엄마한테 달라구해.] 아. 네. 이게 친척이구나. 난 당시 친구들이 하는 말 성지순례라는 것을 부러워 했었다. 설날에 친척집 한 번돌면 10만원 20만원은 기본이라고 하던. 허나 우리집안은 아니네?
그게 아버지의 장애와 어릴적 아버지가 형제분들에게 왕따를 당한 것이 이유가 있다하니 사람들 참 너무한 것 아님?? 난 그래서 친척이 싫다.

어찌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일상 생활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일을 낸다.
난 이 당시까지 어머니는 이산가족이라고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족은 북에 살고 계시다고 알고 있었다. 허나 진실은 전 글에 쓴 바와 같이 남쪽에 다 살아 계셨다. 사실 이제와서 보면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을 만한 일이지 어머니는 57년생인데 가족이 북쪽에 있다는 것은 앞뒤 안맞는 이야기잖아?
어린 당시는 역사에 대해서도 모르고 당근빠따 그걸 연결시킬 머리는 없었다는 것ㅎ
암튼, 무슨 일이냐. 어머니의 가족을 찾아 준다. 원래 아버지의 프로포즈가 니 가족 내가 찾아줄께 였단다. 바로 찾아줬으면 좋았을지도 모르는 걸, 왜 이리 늙었을때 찾았담?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를 기다려서 돌아가신 다음 찾아줬다고 하는 데 왜 그럴필요가 있는 지 난 이해를 못하고 있다.
당시 생각방식인지 찾으면 어머니가 할머니를 이유로 이혼하려 할까봐 지레 겁먹었나.
아버지는 전글에 밝힌 친하게 지내던 경찰들에게 오랜만에 찾아가 다시 뇌물을 먹였다.
[개인정보를 넘겨라]
*어머니의 친척일 가능성이 있는 개인정보는 대략 4팀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4팀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중 하나가 맞아 떨어졌고 어머니는 가족을 찾게 된다. 난 어머니는 친척이 없다고 하던 것이 그동안 숨겨왔던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많이 들 우셨다. 아버지는 의기양양해 했다 약속을 지켰다는 게지
허나 여기서부터 반전이 있었을 줄은 당시 아버지는 생각도 못했다.

5학년때 처음으로 어머니 가족들에게 성지순례의 기쁨을 맞봤다. 당시 15만원정도 내 손에 들어왔던 기억이 있다. 결국 다 저금했고 고스란히 어머님이 가져가 버렸지만-_-
뭐 암튼 그렇게 6학년이 되었고 방학때는 어머님 친척집에서 살게 된다. 뭐 친척과의 교류라나.

사실 아버지 친척이랑도 한 번 있었다. 대구 큰고모댁에서 방학때 한달간 산 적 있었는 데
나 초딩인데 거긴 딸만 3인가 있었는 데 젤 어린 얘가 대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뭐냐구? 난 거기서 뭐하고 놀았는 지 기억이 안나.
하두 답답해서 말해가지고 형이랑 둘이 수영장 갔던 기억이 있는 데.

이쪽은 그게 비해 별 세상이었네. 나보다 두살위에 누나와 한두살 밑의 여동생?
게다가 동갑내기 여자얘도 외숙모쪽 친척이라고 왔네.
옆집사는 여자얘란 얘도 동갑내기네.어이쿠
난 여기서 섹스란 무엇인가 배웠다 -0-;; 나랑은 사돈의 팔촌이니 외숙모가 다리를 놔줄라구 했던 건 기억나는 데 차버렸지;;

큰이모댁은 대구큰고모댁과 마찬가지로 나이차이가 많이 있었다. 작은 형이 30대중반이었나?
그 형은 또 일이 있었으니 우리는 비디오대여점과 친하게 지내며 하루종일 비디오를 시청했었던
기억밖에 없다. 여기서 골드런을 다 봤었지. 비디오 몇개가 없어서 짜증냈던 기억도 있다 ㅋ

초등학교 시절은 대강 이게 다 인듯 싶다. 이어서 난 대전대신중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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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관계로 나의 집안과 어린 시절에 대해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데 써내려 가볼까 한다 ㅎ

*태어나기 이전*
뭐 물론 태어나기 이전부터 내가 아주 어린시절의 경우는 다 들은 이야기뿐이니 투명한 과거는 아니다.
직접 본게 아니니 뭐 믿을 수가 있어야지....<--난 이래서 하나님을 못 믿는 것 같아 ^^;
참고로 이 정보는 90%가 아버지의 기억일 껄..?

집안은 굉장한 크리스쳔이다 교회를 신봉하는 집안이란다. 게다가...할아버지는 또 굉장한 부자였다는 소문이다.
할아버지는 목수였다. 당시 안동에 있던 학교란 학교는 다 할아버지가 만들었단다. 믿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그런 집에서 태어나셨다. 불과 아장아장거릴 몇개월된 얘기때 소아마비에 걸리셨단다. 당시 의학기술로 충분히 고칠 수 있었다는 데, 물론 이제와서 사실 확인은 불가능하다.
암튼, 소아마비의 걸리신 아버지를 고치고 싶었던 할머니는....
기도하셨다. 주구장창 기도하셨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고쳐주신다. 천국으로 이끌어주신다. 결국....
믿음의 힘으로...소아마비를 안고 사는 사람이 되셨다. 아버지가 할머니를 불신하게된 계기다. 돈도 많은 집안에 태어났는 데 믿음의 힘으로 고치실려다 이렇게 되었다는 전설. 그렇다. 어릴적부터 아버지는 장애인이셨다.

요즘말로 왕따. 예전에는 없었을까? 아니다. 아버지가 산 증인이다. 1960년대에 아버지는 장애인이라는...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신 분이다. 친구들끼리의 왕따만이 있을까? 그당시는 아들딸 힘닿는 데까지 순풍순풍낳던 시절이다.
뭐가 말하고 싶냐구? 형제자매끼리도 왕따 있었단다...충격? 이게 현실이라는 거다.
왕따,이지메. 옛날에는 없었다? 아니다 있었다. 다른점은 요즘엔 언론이 활성화됬다는 거 뿐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힘든 어린 시절은 보내셨단다.

그리하여 당시 국민학교를 마치신 아버지는 취업전선에 뒤어들어 닥치고 일을 하기 시작한다. 돈은 할머니에게 다 드렸단다.
동생들 양육비로 쓰엿다는 소문이다. 정말 원통해하셨다.

그리고 적당한 나이에 어머니를 만나셨다.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는 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_-
연애 결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부부싸움을 할 때 연애하던 장소나 시간이 두분의 기억이 다르기에 항상 크게 싸웠던 기억이 있다. 누가 옳은지 알게 뭐야..아니 그게 부부싸움을 할 정도로 큰 문제인가?? 내 개인적인 소견이다 ㅎ

어머니는 괴산사람이다. 어머니가 일곱살때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왜 돌아가셨는 지 물론 모른다ㅋ
7살때라는 것은 어머니는 국민학교도 안나온 사람이다.
당연, 돌아가셨으니 어머니를 부양해줄 부양가족이 사라진 것이다. 결론은 무었이냐...
어머니 친척들이 어머니형제자매를 뿜빠이 해서 나눠 키우게 되었단다.
헌데, 그 당시는 남존사상이 크게 자리잡았을 때이다. 우선적으로 남자형제들이 친척들에 갈리게 됬단다. 여성분들은 천대받던 시절이란다. 여자들중 나이순으로 윗부터 친척집으로 가기로 결정이 났다는 데............어머니는 여자중에 막내였다 -_-
형제자매가 다들 친척집으로 갔는 데 유일하게 어머니만이 여자중 막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집에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고작 7살의 나이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집안 살이를 해야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오싱을 보면서 자신과 겹친다고 우셨던 게 기억난다 ㅎ

그렇게 지내시던 와중에 어머니는 역시 남의 집에서 이렇게 사는 게 환멸을 느끼고 가출을 하게 된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거겠지? 헌데 또 그러한 집에 들어가고 또 가출하고 또 들어가고...
이름만 네번을 바꿨덴다. 그렇게 이름을 바꿨으니 나중에 친척들이 어머니를 찾으려고 해도 못 찾는 거지....-_-;;

그렇게 어머니는 가출과 더부살이를 반복하다가 커가면서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닥치고 기술직을 공부하여 여러가지 기술직에 종사하게 된다. 간병인 미용사등등..
어떠한 계기로 만나게 되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둘은 상처를 보듬아 안아 결국 결혼에 성공한다.
이 당시 아버지는 자신이 고졸이라고 어머니께 구라를 쳤었다 ㅡ.,ㅡ
아버지는 장애인이라는 것. 그리고 형제자매 좋은 학교나왔는 데 자신만이 국졸이라는 것에 상처를 가지고 있던 분이고 어머니는 친척이 없다는 것에 상처를 가지신 분이었다.

당시의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혼이라 보는 시점이라 번듯한 집안의 자손인 아버지는 아무리 장애인인라고 해도 근본도 모르는 여자랑 어떻게 결혼을 하느냐 반대를 당했다.
허나 우리 아버지 고집은 하늘을 찌른다 막무가내다.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결혼은 크리스천집안 답게 교회에서 행해졌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1978년경이 아닌가 추정한다)
그렇게 우리집안에 들어오게 된 어머니는 근본도 없는 여자라 불리며 아버지식구들에게 천대당하기 시작한다. 불쌍하게도... 그렇게 몇년을 참고 참고 지내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가족계획을 가지고 돈이 없어 자식들 먹여살리지도 못하게 할빠엔 안 낳겠다 하고
어느정도 돈을 모은다음 얘들을 낳기로 결정한다. 그러한 와중에도 어머니는 결혼해서 왔는 데 얘를 못본다고 계속 천대받고 있었다. 3년정도 시간이 흘러 슬슬 얘를 낳기로 결심하고 잉태를 했는 데 병원에 갔더니 어라 병이 있네 ㅡ,.ㅡ
이런 왠일 그래서 낙태를 할 수 밖에 없었다구 한다. 자식은 또 낳으면 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면 끝이라는 아버지 지론에 그렇게 첫 아이가 하늘나라로 갔다.
어머니의 병을 고치려 노력하고 노력해서 결국 고치는 데 성공하고 슬슬 아이를 또 가져볼까 하고 가진 아이가 나의 형님이 되겠다.
헌데 뭥미 낳아보니 그 병이 유전됐네 ㅠㅠㅠㅠㅠ
돈이면 안되는 게 없다 병은 고쳤다.

자 이제 자식도 낳았고 하니 어머니가 천대받는 건 줄겠지 했는 데 시집살이는 여전했다. 뭐 당연하지 아무래도 고부간의 갈등이 우리사회에 문제가 될 정도로 큰데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스펙은 갈구기게 딱 적절하게 암것도 없지.. 갈굼당하던 현실을 직시한 아버지는 결국 어머니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결심하게 된다. 가족을 버렸지.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서.
서울에 살던 본가를 버리고 대전으로 내려왔다. 모두에게 숨기고.
대전에서의 생활은 순탄한듯 보였다. 형을 기르며 나를 낳았다 ㅎ
구멍가게 슈퍼 오락실을 운영하며 돈을 벌었다.
약간 불법인 일도 많이 했었단다.
그 기억하실려나 옛날 다방같은 데 보면 100원인가 넣고 돌리면 오늘의 운세같은 거 나오고 하던거
뭐 운세재털이 운세자판기등등 요런건부터 시작해서 돈넣고 돈먹기등등...
당시의 경찰들에게는 뇌물을 찔러주면 눈 감아줬다. 지금도 그런가? ㄷㄷ
그리하여 아버지는 경찰들과 친하게 지내며 돈을 긁어모았다.
슬슬 얘들도 커가고....
모아서 모아서 손을 털고 시작한게 비디오대여점이다. 내가 기억을 하는 것은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당시 도마동에 살았다.어릴적 아버지는 내느낌에 일주일에 한번정도 집에 오셨다. 뭐 내가 자기전에 출근해서 자고나서 들어왔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_- 그렇게 옆동네인 정림동에서 비디오대여점을 운영했었다. 형은 학교를 다녔고 난 혼자 집에서 내 몸만한 개와 함께 매일 빈둥거렸다. 난 학교를 다니던 형이 부러웠다 가끔 몰래 따라간적도 있던 기억이 있다. 한번은 형이 너무 부러운 나머지 형의 학용품중 하나 온도계를 가지고 몰래 놀았다. 아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
어떻게 놀았는 지 온도계가 부서졌다 어린 마음에 나는 원래 있던 장소 고대로 냅두고 나몰라라했었다 ㅡ,.ㅡ
아학 당삼 어머니는 형에게 뭐라하고 형은 몰라몰라 했다ㅠ
..알리가 있나 내가 했는 데..
그런 어머니는 날 가리키며 저 작은 뭐가 관심이 있다구 이런 온도계같은 걸 만질 것같냐. 온도계는 유리도 된거니까 관리 제대로 안하면 이리된다구 관리를 제대로 안한 니가 잘 못한 걸 아직도 몰겠냐 이러면서 형을 사랑의 매로 다스렸다. 난 맞기 싫었다. 죄책감이란 이런 거구나 공부가 되었다.

난 개가 좋았다. 내 몸만한 개가 좋았다. 우리집 개는 온순하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온순한 우리집 개넘이 밥을 먹을 때 난 친구들과 함께 개넘을 건들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나에게 말했다. [물것같아 무서워] 그 말에 나는 한순간 영웅이 된듯이 말했다 [괜찮아 우리집 개는 안 물어 자,봐]
난 개에게 얼굴을 물렸다 ㅡ,.ㅡ
빰을 물린 건 기억하는 데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기억안난다. 아팠는 지 안 아팠는 지도 기억이 안난다-_-;;
하지만 저 상황과 대화내용이 기억속에 남아있다..
나중에 커서 이 개가 어떻게 되었는 지 궁금해서 아버지께 여쭤본적이 있다.
그날로 복날의 개가 되었다고 하더라.

어릴때 날 좋다고 따라다니던 동갑내기 동네옆집여자얘가 있었다고 한다.
사진까지 남아있는 데.. 난 안타깝게도 전혀 기억이 안난다ㅠ
사실 대학 막 들어가서 여자들 꽁무니 쫒아다닐때쯤에 이 여자의 존재가 지금 있었었으면 하고 망상&공상을 많이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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