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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한국경제


● 신자유주의 경제 사상


1970년대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커다란 시련을 맛보게 된다.


중동에서 전쟁이 터지자



 

아랍의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을 편드는 서방국가에 대한 시위로


석유를 팔지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국제 유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자 세계 각국에서는

석유값과 전기값이 올랐고






수익성 악화로 

공장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게 되었고


공장이 문을 닫자 거리는 

직장을 잃은 실업자로 넘쳐나게 됐다.





그렇게 슬럼프에 빠진

세계의 경제는


좀처럼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 당시에는 물가가 뛰어오를 것이라는 예상에 '사재기'가 만연했다.


그런데 석유 값이 올라

물가가 상승했는데도 불구하고


실업율이 높다는 것은 

당시의 고정관념으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케인즈가 분명히 그랬잖아.


경제가 불황이면 

돈을 찍어서 부양시키고


경제가 호황이면 

돈을 거둬들여 과열된 걸 식히라고."





케인즈의 이론은 

1930년대 미국의 경제대공황을 처방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면서


1970년대까지 세계 각국에서는

경제정책의 바이블로 맹신하던 이론이었다.






"분명히 그랬지.

그런데 요즘은 물가도 높고

실업률도 높잖아."




"케인즈 이론은 순 엉터리였어.

이럴 때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하잖아."




▲ 스태그플레이션 : 경기는 불황인데도 물가는 높았던 상황


결국 이런 불신감이 팽배했고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나왔다.



 


 시카고대 교수1

"인위적인 경제정책으로는 

단기적인 효과 밖에 얻지 못함.


경제개발계획이니 사회복지니 하는 것은

공산국가처럼 비효율성만 초래할 뿐임." 



 시카고대 교수2

"맞아. 정부가 나대면 

결국엔 경제가 망함.


요즘 경제가 침체한 것은

각종 규제로 기업을 옭아매려는 정부의 정책 때문임."





그리고 이런 경제 사상은 

크게 득세하여


미국과 영국에서는

레이건 행정부나 대처 정권과 같은 

신보수주의(신 자유주의) 정권이 집권하기에 이른다.

 


 레이건

"앞으로 세금 줄이고, 각종 규제 줄이고, 

노조도 약화시켜줄테니

기업들은 맘놓고 장사하라능."


레이건

"국가 세금을 좀 먹는

방만한 국영기업들은 

모두 민영화를 시켜서 효율성을 높이겠음."



 대처 수상

"경제 개입을 최소화하고

치안과 질서에만 힘쓰는

작고 강한 정부를 만들겠음."


이른바 탈규제화, 

민영화 정책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전세계 자본주의의 리더

미국이 실시하자



▲ 레이거노믹스


곧 모든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 사상'은

급속도록 확산되게 되었다.



● 개방화의 요구


신자유주의 사상이

선진국을 중심으로 히트를 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70년대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성장하면서 

나름 매혹적인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더 이상 아시아는 가난하지 않아.

인구도 많고, 높은 경제성장으로 

구매력도 왕성함."




"그런데 물건을 

당최 팔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맞아. 자국의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어찌나 관세를 매겨대는지."


이렇게 서방의 기업들은

개발도상국의 시장을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선진국들은 

이미 포화가 된 자국의 시장에서는 

만족할만한 투자기회를 찾기가 어려웠다.


바로 이럴 때 미국을 필두로

'신자유주의' 사상이 대두된 것이었다.


"모든 규제를 철폐하겠어. 관세도 철폐하겠어.

국제 무역도 철저히 시장경제 논리로 임하겠다능."



"어? 그럼 우리 물건 

앞으로 관세 안 매기는 거임?"


"그럼, 그렇고 말고."


"어??"


"대신 너희도 관세 철폐해."


결국 이런 의도였다.


"우리가 자유무역 하겠다는데

너희는 왜 치사하게 굴어?"


결국 미국을 필두로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선진국들은 호황기에 있어서


개도국과의 무역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사정을 봐주고 특혜를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선진국들의 경제가 침체되고


일부 개도국들은 세계 시장에서 

어느덧 경쟁의 상대로까지 성장하게 되자


더 이상 선진국들은 개도국에게 

너그러운 아량을 베푸려 하지 않았다.



"내 코가 석자야!"


결국 이러한 선진국들의 입장 변화가

전세계 국가들에게 

개방화를 강요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선진국들은 

1986년에 우루과이 라운드(UR)를 통해


장차 WTO라는 기구를 만드는데 

포석을 깔게 된다.


 

"WTO는 구체적으로 뭥미?"


"개방화 정책에 반대하면

강제적으로 제제를 가하겠다는


선진국들을 위한 맞춤 기구."


 

"아!"



● 경제자유화 요구


그런데 딱 이런 시점에 


우리나라에서도 내부적으로 

자율화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게 된다.


▲ 부마항쟁 (1979년)


특히 정부주도형 경제체제에 대해

기업들은 불만이 많았다.


물론 60~70년대에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하게 하는데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도한 국가 개입 때문에


민간 부분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억제되고 있다는 비판이 많았던 터였다.


"60~70년대 고도성장을 했던 개도국들은

대부분 정부주도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지."


 

"어, 그랬어?"


"하지만 정부주도형 성장이라는 것은

경제가 미숙한 상태에서나 효과적이었지


경제가 양적으로 성장된 상황에서

무리가 있고, 한계가 따랐어."


 

"아!"


"우리나라는 70년대 후반부터

그런 조짐이 점차 나타났고.."


"80년대로 가면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이미 세계 20위권 정도로 커지기 때문에


더 이상 정부가 나서서

감놔라 대추놔라 하기가 어렵게 됐지."



▲ 1980년대 초반 서울


때문에 기업들은 

경제적으로 자유를 요구하게 됐고

 

일반 시민들도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 518 민주화운동


여기에 미국도 압박하고 있었다.


결국 새 정권은 대내외적으로 

다각적인 자유화와 개방화 조치들을 행해야만 했다.


 전두환

"앞으로 통금해제!

밤 12시 넘어서 돌아다녀도 잡아가지 않겠삼."



 전두환

"학생들은 두발자유화, 교복자율화 실시!



펑키머리를 하든 

빤짝이 옷을 입든 상관 않겠삼" 



 전두환

"해외여행도 자유!"



한편 기업 활동에 대한 

국가 개입의 배제라는 측면에서 


자율화는 공기업의 

'민영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두환

"시중 은행들 앞으로 민영화!

니들 꿔주고 싶은대로 꿔줘도 됨."


당시까지 은행들은 모두 정부 정책을 위한

자금 창구와도 같았는데


1981년 이후로 민영화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 한일, 서울신탁, 제일, 조흥은행 등이 민영화되었다.

 

그 밖에도 이런 사업들을 민영화했다.

 

 전두환

"대한석유공사 민영화!"


 전두환

"포항제철, 한국전력은 

단계적으로 민영화 시켜줄거라능."



그리하여 포항제철은 

2000년 경에 완전히 민영화된다.



● 삼저 호황


195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은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 1960년대 초반 일본의 주요 수출품 : TV, 라디오, 전화기


1980년대 초가 되면 (1인당 소득에 있어)

미국과 경제적으로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서게 된다. ☞ 참고


당시 일본의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것은 수출로서,


▲ 80년대 일본의 자동차


일본은 경제성장을 유지하기위해 

환율을 고정시키며 무역흑자를 이어가고 있었다.

 

때문에 미국은 불만이 많았다.


"아놔, 일본 물건들은 값이 싸서

도저히 미국의 물건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능."


"맞아. 지금 미국의 제조업은 

파탄 일보직전임.


게다가 무역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고.."


 

결국 미국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앞으로 일본 엔화가치 팍팍 올리라능."


결국 1985년 플라자 합의를 기점으로

엔화 가치는 1년 사이에 

거의 두배 가까이 뛰어오르게 된다.


▲ 엔/달러 환율 추이


그랬더니 느닷없이 

반사이익을 받은 나라가 있었다.


누규?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우리나라는 비록 후발주자이긴 했지만


전자제품 분야에 있어 

당시 일본과는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수출이 크게 주춤하자

우리나라의 수출은 크게 탄력을 받게됐지."



 

"아!"


여기에 미국은 자국의 달러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달러화를 대량 찍어냈기 때문에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지자

달러화의 이자율 역시 낮아졌다.


▲ 미국의 80년대 이자율

 

 

"왜 돈을 찍으면 이자율이 낮아져?"


"시중에 돈이 많아지면 

그만큼 돈을 꿔주려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꿔가려는 사람들은 줄어드니깐."


 

"아!"


그렇다면 함 보자.


엔화가치는 높아지고 달러가치가 낮아졌다.



달러가치가 낮아진만큼 국제 석유가격도 낮아졌다.

 

달러의 이자율도 낮아졌다.


이렇게 3가지가 낮아지게 되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80년대의 '3저(低)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이익을 봤을까?


엔화가치는 높아지고 달러가치가 낮아졌다.


일본 제품의 수출이 줄어들자, 한국 수출은 반사이익

 


달러가치가 낮아진만큼 국제 원자재 가격이 낮아졌다.


 석유 등의 원자재를 싸게 사올 수 있게됨.



달러의 이자율도 낮아졌다.


 싼 이자로 외국에서 돈을 꿔올 수 있게됨.


 

결국 ~번의 효과들로

우리나라는 유례없던 특수를 누리게 되었고


한국은 이 시기 수출 증대로 인해 


건국 이래 최초로 

경상수지 흑자를 달성하기도 한다.


▲ 우리나라의 80년대 경상수지 상태


바로 이 시기(1980년대 후반)를 두고

흔히 '삼저 호황시대'라고 한다.


 

"아! 운 좋은 전두환."



● 구조조정 노력과 한계점


70년대 정부 주도형 성장정책은

고도성장을 주도해 왔지만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고 있었다.


 

"어떤 사회적 비용이 있었는데?"


"정부↔대기업 간의 긴밀한 유착으로

정치인들은 부패했고

대기업들은 쉽게 독과점으로 변했지."


 

"독과점이 되면 어떤게 나쁜데?"


"독과점이 되면 

시장에 경쟁자들이 사라지게 됨."


 

"그래서?"


"기업은 품질개발에 소홀히 하게되고

가격을 높게 책정해서

소비자들에게 부담을 씌우려 들지."


 

"아!"


"또 정부 주도형 성장정책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중소기업이 위축되고


은행은 정부의 입김대로

꿔주고 싶은 기업한테만 

특혜를 베풀게 되는 문제점도 나타나지."


▲ 정부주도형 계획경제


때문에 8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하나 둘씩 인식하게 되고


경제를 구조 조정하고자

여러가지 특단의 조치를 단행하게 된다.


"기업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개방화에 요구에 맞춰

외국인들에게 국내 산업의 문호를 개방한 것도

 

모두 다 이런 이유에서였지"



▲ 개방화의 상징, 88 서울 올림픽


하지만 구조조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전히 국가의 입김이 주효했으니..

이런 일도 있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 국제그룹은


재계순위 6위에 등극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재벌이었다.



하지만 국제그룹의 회장은

평소 전두환 정권에게 

뇌물을 바치는데 소홀히 하고 있었다.


이럴 때 어느날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재벌 총수들을 불러모아 놓고 

만찬회를 하고 있었다.


 전두환

"이번에 내가 

재단(일해재단)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하는데

각자 얼마씩 내줄 수 있삼?"


 삼성그룹

"저는 15억 내겠습니다."

(당시 15억이면 오늘날 200억에 가까운 금액이다.)


 현대그룹

"각하, 저도 15억."


 럭키금성그룹

"저는 12억 내겠습니다."


 국제그룹

"저는 5억.."


 전두환

"뭐? 5억??"


이말에 전두환은 빈정이 상했다.


예전에도 3억만(?) 바쳤다고 

대놓고 면박을 주기도 했었던 터였다.

 

이후 국제그룹은 어떻게 됐을까?

 

 

기업들은 사업을 하다보면

필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정치권의 지시로 국제그룹은 


이후 시중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려올 수 없게 된다.


 

"헐! 말도 안돼."


그리고 얼마 후 

국제그룹은 부도 처리되어 공중분해 되고 


그룹은 다른 기업들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된다. 


▲ 당시 보도 자막


만화같은 얘기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즉 구조조정을 외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경제 개혁(?)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개방화에 대한 대응도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했으니..


여전히 기술집약적인 부품 소재들은

외국(특히 일본)에서 수입해 오면서



우리나라는 가공조립을 통해 

완성품을 만들고


그걸 싼 값에 외국으로 팔아넘기는 식으로

가격 경쟁에만 치우치고 있었다.



"품질 개발이 안되니

가격을 낮추는 것으로 경쟁력을 삼았던 것이지."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수출을 많이 해봤자 

이윤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맞아. 이런 이유로

3저 호황이 끝나는, 1990년 부터는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무역 적자국으로 

다시 돌아서게 되지."




1990년대의 한국경제


● 위기의 90년대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경제는 

겉으로는 매우 좋아 보였다.


경제규모는 세계 11위였고

한국 밑으로는 인도, 러시아, 멕시코, 호주 등이 있었다. 

▲ 우리나라는 1994년부터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까지 줄곧 GDP 세계 11위를 유지했었다.

 

 

1995년에는 1인당 소득이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서기도 했으며 ☞참고



대한민국은 자칭 선진국이 됐다며

샴페인을 미리 터트렸고



그 기세로 일명 경제선진국가 단체인 

OECD에 가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여전히 경제는 매년 7~9%의 

고도성장을 구가 중이었고


▲외환위기 이전의 90년대 경제성장율


실업률은 낮고

물가수준도 양호했다.


당시 외국의 한 경제 분석가는

곧 한국이 G7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었다.

 

다만 이런 와중에도

불안의 조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경상수지가 만년 적자였다.



무역 적자를 줄이고

균형수지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원화가치를 떨어뜨려서

기업들의 수출을 도모해야 했지만


▲ 원화가치를 떨어뜨려서 지렛대의 추를 조정해야만 했었다.


정부는 국민소득 1만불이라는 

상징성을 위해서라도

한사코 인위적으로 환율을 유지하려 들었다.


 김영삼

"1만불 사수해.

정권의 체면이 있지!"


또 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은 

여전히 그칠 줄 몰랐고

 

호황기를 틈 타 저마다 

무리한 사업 투자를 하고 있었다.

 

 대우그룹 회장

"대마불사라고 했잖아.

몸집을 불리면 언젠가는 그게 다 돈이야."


그러던 중 1996년.


몇년째 안좋던 경상수지가

최악의 상황까지 빠지게 된다.


경상수지 적자의 수준은

무려 GDP 대비 4%를 넘어서게 되었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것은


기업들의 수익성이 상당히 나빠졌다는 

방증이기도 했지."


그러더니 1997년 새해 벽두부터

대기업들의 잇딴 부도 소식이 들려왔다.


한보가 무너지더니



삼미가 무너지고



진로가 무너졌다.



한편 당시 은행들은 

금리가 싼 선진국에서 단기로 돈을 빌려서


금리가 높은 동남아에 

장기로 투자를 하는 식으로 


이른바 '돈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남아 경제가 심상치 않았다.


90년대 들어 꾸준히 호황을 누리던 

동남아 경제가 몇년째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연이어 화폐가치가 폭락했다.





"경상수지 적자가 계속되면

왜 화폐가치가 떨어짐?"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하잖아.


그런데 적자가 계속되면 

나라의 금고에서 달러가 자꾸 빠져나가게 되지."


"그런데?"


"공급이 줄어들면 가격이 오르잖아.


달러 역시 부족해지는 만큼

달러의 가치가 오르게 되는 거임."

(=자국의 화폐가치가 떨어지는거임)


"아!"


여튼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터진 위기는

동남아 전역으로 확산됐다.


"원래 증권 투자라는 것은 

소문에 민감하거든."


"그래서?"


"어떤 국가에서 부도소식이 들리면

대부분 이웃나라까지 덩달아 피해를 입게됨."


"왜?"


"투자자들 심리가 그러함.


혹시 위기가 번질까 싶어

투자자들은 미리 자금을 빼내는 거지."

 

때문에 동남아발 금융위기는

당시 동아시아의 나라들을 


모두 한번씩 

건드려보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고)



그러다가 버티면 괜찮았지만

쓰러지면 도리가 없었다.



● IMF 구제 금융


태국 : KO



인도네시아 : KO



말레이시아 : KO

 

필리핀 : KO



홍콩 : 버텨냄



대만 : 버텨냄



그리고 다음 타자는 한국이었다.


외국인들은 갑작스레 

한국의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기아가 무너졌다.

기아는 한국에서 8번째 대기업이었다.



주식과 더불어 채권도 회수해갔다.


외국은행들은 만기가 돌아온 

한국의 채권에 대해 기존 관행과는 달리 


만기 연장을 거부했고 

빚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은행은 달러로 빚을 갚아야 했다.

때문에 달러가 빠져나갔고 환율이 급등했다.

 

결국 부족한 달러는 

정부의 외환 보유고에서 풀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부라고 달러가 많았겠는가?



장기적인 수출부진으로 

외환 보유고도 충분치 않은 상황이라


정부에서 달러를 풀어도 

금방 사라졌다.


때문에 원화가치는 속절없이 떨어지고

달러를 구하지 못한 기업들은 하나둘씩 쓰러졌다.


▲ 당시 환율은 2천원까지 뛰어올랐다.


급기야 외환 보유고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의 달러 보유고는 

총 39억 달러에 불과했다.


39억 달러란 

사실 어처구니 없는 수치다.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석유도 사고 원자재도 사야하는데



한달 수입액으로만

당시에는 120억 달러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외환 창고에는 

39억의 달러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우리나라는 미국에 지원요청을 했다.


 임창열 경제부총리

"도와주삼."


하지만 미국은 한사코 거부했다.


"직접적으로 꿔줄 수는 없음.

IMF를 통해서 지원받으라능."

 

당시 미국은 한국의 사태를

수개월 전부터 감지하고


이참에 한국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서

시장을 전면 개방시키려 하고 있었다.



때문에 한국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일본과 중국의 행동도 막고 있었다.



"어찌보면 IMF는 국제 기구라는 탈을 쓴

미국의 이익단체와도 같았음."


 

"읭?"


"IMF의 최대주주가 미국이거든."




"지금도 미국은 유일하게 

IMF 내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지."



● '외환위기'의 급한 불 끄기


결국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됐다.


 경제부총리

"돈 좀 꿔주삼."


 캉드쉬 IMF 총재

"대신 몇가지 약속을 해주삼."


 IMF 총재 

"지금 한국 금융기관들 너무 폐쇄적임.

외국인한테도 거래의 자유를 팍팍 줬으면 함."


 경제부총리

"그러죠."


하지만 이런 국가적 약속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한국경제의 중요한 결정은 

모두 IMF에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제신탁통치'라고까지 했다.


 

다만 이렇게라도 했기에

겨우 50억 달러를 빌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수십억 달러의 돈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만기가 도래한 외채는 

연장되지 않고 계속 빠져나갔던 것이다.


 

"돈을 꿔오면 뭐해.

갚는 돈이 더 큰데.."


설상가상으로 세계은행도 한국에 돈을 꿔주는데

높은 이자율을 매기고 있었다.


 경제부총리

"이자 좀 내려주삼.

이건 너무 불공정함"


하지만 거부당했다.


외국인들은 과연 한국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할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궁지에 몰린 한국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새 대통령이 나서서 외국인들을 안심시켰고


 김대중

"IMF 합의 내용 철저히 이행하겠뜸."


국민들은 자청해서

금모으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전국민이 장롱 속 금붙이들 수출하면

수백억 달러를 모을 수가 있음."


사실 이런 모습은 

외국인들에게는 충격에 가까웠다.



그동안 IMF가 구제금융을 지원해줄 때


국민들이 나라를 살리겠다며 

집단적으로 행동을 취한 사례는

그 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한 유명 은행가는

당시 금모으기 운동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윌리엄로즈 시티은행 시장

"당사자들이 저렇게도 

절박하게 매달리는데


국제 사회의 지지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눈물 겨운 노력 덕분일까?



한국은 채권 만기 연장에 성공하게 된다.


"사실 외환위기의 탈출은 

IMF의 구제금융보다 


미국은행들의 채권 만기 연장이 

훨씬 도움이 컸음."


 

"아!"


다만 조건이 있었다.


"채권 만기 연장해줄게."


 

"오! 땡큐!"


"대신 조건이 있음.

구조조정 좀 하라능."


"한국 기업들 너무 방만하고

한국 노동자들 너무 철밥통임.


이래 가지고는 외국인들은 한국 시장에

투자하려고 들지 않는다능."


 

"옛썰!"


그렇게 미국은행이 만기를 연장해주자

세계 각국의 은행들도 동참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외환위기의 급한 불을 끄게 됐다.



● 뼈를 깎는 구조조정


하지만 이때까지 국민들은

IMF 구제금융의 고통을 제대로 몰랐다.


그저 나라 경제가 휘청거린다니

금모으기 운동을 통해

달러를 마련하고자 했을 뿐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고통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미국에게 구조조정이란 약속을 했다.


그리고 당장 실천을 통해

보여줘야만 했다.


 김대중

"방만한 기업들 거품 빼자능.


대기업들은 현재 400%가 넘는 ☞부채비율을 

사재를 털어서라도 200% 수준으로 낮춰!"


"헉!"


 김대중

"그리고 중복 사업들은 

모두 한 기업으로 몰아주기 하자능.

빅딜 실시!"


이러다보니 대기업도 망하는 세상이 됐다.


은행은 불안한 기업에게는 

돈을 꿔주지 않았고



높은 이자와 자금난으로

IMF 사태 이후 1년동안 


무려 2만개 이상의 

중소기업들이 쓰러졌다.


여기에 가계 살림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노동시장의 유연화, 즉 정리해고제였다.


 김대중

"정리해고제 실시!"




그러자 많은 국민들이 충격에 빠졌다.


가장은 일자를 잃고,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들은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경기 침체로 자영업자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편 금융시장의 전면 개방으로

우리나라는 장차 


외국자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을 해야만 했다.


사실 금융시장의 개방이야말로

미국이 바라던 바였다.


그동안 미국의 투자자들은

한국 시장을 놓고, 이렇게 불평하고 있었다.


"한국 경제는 너무 정부주도적이고

민족주의적이고 폐쇄적임."


때문에 IMF의 처방을 통해서라도

한국 시장을 개방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미국에서는 한국에서 

부정적인 여론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최근 원화가치 폭락으로 

한국의 주가는 매우 저렴하게 됐는데


이럴때 외국인들이 기업사냥에 나서면

한국 사람들은 

IMF에 농락 당했다는 느낌을 받게될 것임."




하지만 우려한 상황은 일어났다.


자본 시장의 전면 개방에 따라

주요 금융기관은 잇따라 외국인 소유로 변했다.



은행들의 외국인 지분율 비중은 

20% 선에서 50% 이상으로 증폭됐다.

 

경영권까지는 아니지만 

사실상 외국인 지배구조의 은행이 된 것이었다.


 

주식시장에서도 

외국인들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었다.


90년대 말 외국인 지분율을 평균 15%였는데

IMF 협정 이후 30% 가까이로 늘어났다.


"말이 30%이지.


주식처분이 어려운 

기업소유의 지분을 제외하면


외국인들이 기업의 주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임."


 

"아!"


결국 외국인 지분의 상승은 

'자금 확보'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그만큼 외부 충격에 

취약한 구조를 만들게 되었다.




● IMF 구제금융 이후의 한국경제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달러 확보'를 위해서라도


수출에 주력해야만 했다.


▲ 외환보유액은 해마다 늘어나, 현재는 세계 6위 수준이다.


때문에 원화가치를 낮춰서

환율을 높이는 정책을 

최근까지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이렇다 보니

대외의존도가 상당히 커지게 됐다.


▲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수출 6위다 ☞ 참고


90년대말 GDP대비 수출비중은 30%정도였지만

최근에는 50%까지 치솟았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생산물 중

절반 정도를 해외로 팔아먹고 있다는 뜻임."


 

"그럼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면

우리나라도 덩달아 요동치겠는걸."


"당연하지. 중국과 미국이 기침만 해도 

한국 경제는 감기에 걸리고


중국과 미국이 감기에 걸리면

한국 경제는 홍역을 앓는다능."


 

"헐!"


이런 가운데 기업들은

모험을 자제하고 보수적으로 변했다.

 

 

"IMF 때 한번 호되게 맞았더니

다음부터는 몸을 사리게 되더라능."

 

때문에 기업들은

투자를 기피하게 됐고


은행들도 위험한 기업대출보다는

가계대출에 주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업들이 투자를 기피하기 때문에

한국의 성장동력들은 점점 줄어들게 됐지."

 

 

"안타깝네.

최근 잠재성장율도 많이 떨어졌던데."

 

이런 가운데 은행의 가계대출 비중은 

20%선에서 40% 이상으로 치솟았다.


"은행들은 위험하게 

기업에게 돈을 꿔주기보다는


개인들에게 월급이나 주택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해주면 

훨씬 더 짭짤하다는 것을 알게됐지." 

 

 

"그래서 요즘 주택담보금으로

장사를 해보려는 자영업자들이 많아진 것이구나."


이런 까닭에 최근 가계부채 수준은

심각할 정도로 높아졌다.



한편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급증으로 

노동시장은 많이 유연화됐지만


중산층이 감소됐다는 점 또한

피할 수 없는 문제점이었다.


"지난 10년간 중산층은 75%에서 

65%로 줄어들었고

 

반대로 빈곤층은 10%에서 

15%로 늘어났지."



 

"헐!"


결국 우리 경제는 

많은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IMF 사태 이후 

긍정적인 부분들도 많았다.


그동안 수출주도의 경제정책은 주효해서

경제는 꾸준히 성장했고

 

2000년대 들어 한국은 세계가 공인하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참고


▲ IMF 발표 선진국


구조조정을 통해서 

우리 경제는 한층 더 유연해져서


개인은 직장보다 

직업을 더 중요하게 되었고


기업은 규모보다 

전문성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경제 전반에 만연된 불건전한 모습들은 

많이 해소됐고 보다 투명해졌다.

 

특히 2008년도에 세계를 휩쓴

글로벌 위기 속에서도 


한국 경제는 용케도 

파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1997~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에서 배웠던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IMF 사태로 인해

한국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됐다는 점이다.


비록 잃은 것도 많았지만

덕분에 얻은 것도 많았다.

 

혹자는 어차피 한번은 치뤄야 될

통과의례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출처 - http://blog.naver.com/alsn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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