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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류기가 주는 교훈
● 바다를 버린 조선
토인비는 말했다.
토인비
"국가의 멸망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분열로부터 시작된다."
맹자도 말했다.
맹자
"민심을 배반한 군주는
하늘의 뜻으로 응징을 당한다."
결국 한 나라가 멸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를 꼽자면..
'내부 모순'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게
동서양 석학들의 공통적인 생각인 것이다.
조선시대를 상기해보자.
여러가지 내부 모순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는 이런 것도 있었다.
바다를 버렸다.
사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국가 방위 개념에
바다를 지킨다는 것이 없었다.
왜구나 서양 오랑캐의
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고의적으로 해안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밤이면 해안에서 불빛을 보여서는 안되었으며,
섬에서는 모든 주민을 철수시키는
이른바 공도(空島: 섬을 비우다)정책을 썼다.
그런가하면 일본의 침략을 뻔히 예상하고도
이순신은 배를 완공하지 못하고
조립 직전까지만 준비해 두었다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첩보를 받고서야
급하게 조립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서야
거북선의 시운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 정말, 이순신 장군 없었으면
조선은 200년 역사로 끝날뻔.."
사실 이런 공도정책은 따지고 보면
중국의 해금정책을 고스란히 따라한 것이었다.
14세기 중엽 이후 중국의 해안가는
쉴새 없는 왜구들의 침입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뤄야만 했다.
이때 명나라가 선택한 조치는
극단적이었다.
"아예 해안가 마을을 텅텅 비워버려서
해적들이 훔쳐갈게 하나도 없게 만들어라."
"어차피, 중국은 땅덩이 커.
지금 북쪽 오랑캐 막기도 벅찬데
바닷가 해적들 신경쓸 새가 없다능."
이랬던 것이다.
그런데 3면이 바다인데다,
국토도 좁은 조선이 그걸 보더니
고스란히 따라한 것이었다.
"무조건 중국꺼 따라하면 장땡이구나."
● 하멜의 표류
때는 1653년 8월 15일 밤이었다.
제주도 모슬포 앞바다에
한 척의 이양선이 난파되었다.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멜 일행의 표류였다.
워낙 폭풍이 심했던지라
선원 64명 중 28명이 현장에서 익사하고
36명만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해안가에 올라왔다.
날이 밝자 섬 주민들은 그들을 발견하고
관아에 신고를 했으니,
포졸들이 당도하자
네덜란드 선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가사키, 나가사키"
자기들이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가려다가
난파한 선원들임을 알렸던 것이다.
하지만 현감은 막무가내로 선원들을 체포했고
달아나지 못하게 목에다 방울을 달았다.
이때 관헌과 주민들은 해안에 표착한
이양선의 유류품들을 약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곧 제주 목사에게 끌려갔다.
목사는 이들 이방인에게
친절하게 호의를 베푸는 한편
파발을 띄워,
어떻게 이들을 처리해야하는지
조정에 문의를 했다.
그렇잖아도 당시 조정에서는
나선정벌(1651년)을 통해
서양 오랑캐들의 화포술을 익히 알고 있었다.
"오랑캐들을 한양으로 데리고 와서
화포를 만들게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게 좋겠구나.
듣자하니 이넘들이 화포 만드는 재주가 비상하다고 하니.."
그런 사이에 하멜 일행은
몰래 배를 훔쳐서 탈주를 감행했다.
하지만 곧바로 붙잡히고 말았다.
동네방네 개들이 짖어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조선 개들은 왜 이렇게 냄새를 잘 맡은거임?
유럽개들은 상대도 안되겠네.."
"훔쳤어도 우리는 물귀신됐어.
저런 허술한 배로
어떻게 나가사키까지 갈 수 있단 말임."
그렇게 네덜란드인들은 조선의 배를 보더니
마음을 접게 된다.
그리고 곧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 노리개가 된 근대문명
한양으로 올라 온 뒤로 네덜란드인들은
당최 할 일이 없었다.
화포를 만드는 일은,
청나라 눈치가 보여서 곧 단념 하고 만다.
사실 북벌을 주장하던
효종 자신 조차도
북벌은 왕권 강화를 위한 구실에 불과했었지,
절실한 마음은 애초에도 없었다.
효종
"나도 한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있었다고.
직접 보고 느끼고 왔던게 나임.
효종
"누구보다 걔들을 잘 아는데
우리가 뭔 수로 싸워서 이김?"
그런 와중에,
청나라 사신이라도 도착하는 날이면
사신단의 눈을 피하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단체로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네덜란드인들이 조선을 위해서 하는 일이란
겨우 광대놀이에 불과했다.
고관 대작의 집에 불려 들어가 그들은
서양의 춤과 괴성 같은 노래를 들려줌으로써
사대부들을 즐겁게 해줬다.
코는 튀어나오고, 머리는 누렇고,
피부는 허옇고, 눈은 파랗고..ㅋㅋ"
그들은 동물원의 구경거리에 가까웠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가지고 왔던
총포와 도검들은 녹여서
농기구를 만드는데 보태졌다.
그나마 군인이 되어
밥값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네덜란드인들의 기대는
그야말로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네덜란드 인들은
멀리 남쪽 지방으로 귀양가게 된다.
"오랑캐들 데리고 있어봐야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괜히 나중에 청나라 사신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뒷일만 골치 아파짐."
그리고 남쪽으로 강제 이송된 네덜란드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거지나 다름없는 생활로
유리걸식을 하게 된다.
절간을 찾아가 스님들의 보시로 연명하는가 하면
구걸을 하고 품팔이를 했다.
그러는 사이 14명이 죽고 22명만이 남았다.
그리고 이들은 수년간 모은 돈으로
겨우 배를 한 척 마련하고
그걸 타고 나가사키로 탈출하게 된다.
● 일본이 조선과 다른 점
하지만 일본은 조선과 달랐다.
1543년 포르투갈의 상선은
태풍을 만나 일본 규슈섬 남쪽,
다네가시마에 표류하게 된다.
당시 일본인들을 포르투갈 선원들을
우호적으로 대하면서
향후 정기적인 교류를 약속하며
일행들을 무사히 돌려보내줬다.
▲ 16세기 일본에 정박한 포르투갈 선박
이유는 이러했다.
당시 일본은 절실했다.
중국에서는 미운털을 박혀서
무역의 길이 막혀 있었고
조선은 일본인들을 얕잡아 보고 무시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인들과 마주친
이방인, 포르투갈인들은
한낱 미개한 오랑캐가 아닌,
새로운 교역의 대상이자 탈출구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받은
조총 두 자루를 노리개 정도로 치부하지 않았다.
뜯어보고 분해해보면서
성능을 실감하고,
곧 유사하게 만들어냈다.
그러다 불과 40년 뒤에는
전세계 조총의 절반 가량을
일본 혼자서 보유하기에 이른다.
조총의 기술 뿐만 아니었다.
곧 네덜란드인들과도 교류를 실시하여
조선술과 항해술, 의술도 배워
이른바 '난학'이라는 독특한 학문 체계를 완성했고,
▲ 서양의술의 보급
이것이 근대 일본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으며,
곧 조선 침략의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반면에 조선은 어떠했는가?
지배층의 확고부동한 성리학 세계관은
서양은 어쩌다 화포술 재주만 갖춘
미개한 오랑캐에 불과했다.
"지금 중국이 가장 예뻐하는
신하국 1순위가 우리 조선임.
고로 조선은 세계 2인자.^^
뭐하러 미개한 오랑캐 문명에 관심을 가지나."
이러한 논리로 일관하였기에
19세기 서세동점(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의 시기에도
조선은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이양선의 출몰과 쇄국정책
● 나폴레옹이 만난 조선
때는 1817년 초, 아프리카 서남쪽 육지에서
2천km나 떨어진 절해고도, 세인트헬레나 섬이다.
이곳에 영국인 선장 배질 홀은
유배 중인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 섬에 들렸다.
그는 비록 영국인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파리에 유학하던 시절,
나폴레옹의 가장 아끼던 후배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안부인사도 드릴겸
나폴레옹을 만났던 것이다.
나폴레옹
"오! 그래, 반갑네. 아버지는 잘 계시고."
배질 홀
"잘 계십니다."
나폴레옹
"어딜 갔다 돌아오는 길인가?"
배질 홀
"아시아 동쪽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들렸다 오는 길입니다."
나폴레옹
"거긴 왜?"
배질 홀
"황금이 많다는 정보가 있어서요."
나폴레옹
"황금이 많던가?"
배질 홀
"아직 조사만 슬쩍 하고 왔습니다.
이것이 그곳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홀 선장은 조선의 모습을 스케치한
그림을 보여줬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경탄했다.
나폴레옹
"캬~ 저게 담뱃대란 말이지?
헐, 굉장한데.."
나폴레옹
"그건 그렇고, 그곳 사람들은 어떻던가?"
배질 홀
"상당히 순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척이나 평화스러운 걸 좋아해서
유서가 굉장히 깊은 나라인데도
아직까지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나폴레옹
"과연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한반도 쳐들어가 보지 않은 민족이 있을까?
내가 다시 천하를 통일하면
그때 반드시 꼭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가보지."
하지만 그런 나폴레옹의 바람과는 달리
4년 후 그는 섬에서 죽고 만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지만
어쨌든 시대를 풍미한 천하의 호걸, 나폴레옹도
조선의 평화정책을 보며 의아해했다.
● 조선은 황금의 나라?
사실 19세기 초에는
요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연원을 보면, 18세기 초
조선에는 한번도 와 본 적도 없는
프랑스의 뒤 알드라는 선교사가
청나라에서 줏어들은 얘기로 책을 출간하여
서양에 소개했던게 시초였다.
그의 책 내용은 이렇다.
뒤 알드
"조선은 중국의 변방에 위치한 속국으로서,
원래 중국인 기자가 세운 나라였다.
사람들은 인종적으로 남방계와 북방계의 혼혈인데
북쪽에 사는 사람들이 더 건장하고 호전적이다."
뒤 알드
"이들은 평소 음악을 즐기고
예의와 효도를 중시한다.
법의 기강이 엄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립문을 닫지 않고 살아도 좋을 만큼
도둑이 없는 나라다."
뒤 알드
"이 나라는 모피와 종이가 우수하고
유약이 발달되어 도자기가 아름답다.
무엇보다 금이 풍부하여
심지어 옷의 장식까지 죄다 금으로 치장하고 있다.
특히 이런 금은 부장품으로 함게 매장된다."
이렇게 썼으니..
가뜩이나 약탈심으로 가득찬 서구의 모험가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때문에 19세기 초부터 서구 국가들은
저마다 조선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특히 서해안은 그들이 침략을 발판으로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다.
대략 미국은 인천만을 중시했고
독일은 아산만, 영국은 옹진반도 일대를 타겟으로 삼았다.
그런 때에 홀 선장은
1816년 9월 서해안에 상륙하고
그 일대를 탐사했던 것이다.
● 조선인들은 외국인에 우호적이었다
홀 선장 일행이 충청도 비안만에 상륙하자
주민들이 다가오더니
제일 먼저 표시한 의사는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이었다.
주민들의 목이 달아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홀 일행은
주민들이 막아서는 것을 뿌리치고
기어코 마을로 들어섰다.
홀 선장은 그곳에서
자신들이 가진 물건과
조선의 토산품을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주민들은 특히 시계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이어 관아에서 신고를 받고
관리들이 도착했다.
조선의 관리들은
두려움과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그러자 홀 선장 일행은 관리들을
자신의 배로 초대하며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배질 홀
"인간사가 다 그렇지
서먹함을 푸는데 술보다 좋은게 어딨겠어."
그렇게 호의를 받게되자
그제서야 조선 관원들의 긴장은 완화됐다.
하지만 조선 관원들과 홀 선장 일행은
당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비인 현감
그저 손짓 발짓만으로
대충 의사소통을 할 따름이었다.
그럴때 관원 일행 중 하나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다.
그러자 홀 선장은 급히 군의관을 호출하여
응급처치를 하게 하였으니,
신기하게도 말짱히 나았다.
처음으로 서양 문물의 경이로움을
직접 몸소 체험하게 된 순간이었다!
비인 현감
"거참 신통하기도 하지.."
이후로 홀 선장과 관원 일행은
급속도로 친밀해졌다.
현감이 단도에 관심을 보이자
선장을 이를 기꺼이 선사했는가 하면,
다른 여러 가지 선물도
아낌없이 퍼줬다.
현감이 대포의 시범 발사를 요구하자
함포를 낮게 조준하여
발사를 해보이기까지 했다.
배질 홀
"황금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까짓것."
그리고 이틀이 흘러
홀 선장은 육지를 상륙하고 싶다는
의지를 간곡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현감은
연신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몹시도 난감해했다.
비인 현감
"아이고 속터져. 안된데도 그러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 일행이 막무가내로 상륙하자
현감은 눈물을 흘리며 앞장을 섰다.
"아놔, 이러면 내가 제명에 못사는데. ㅠㅠ"
심지어 옆에서 시중을 들던 아전까지
모두 큰 소리로 울었다.
그들은 말끝마다 손으로 목을 쳤으며,
이틀 씩이나 재워줬으니
이제 자신들은 죽은 목숨임을 강조했다.
재빨리 지질조사를 마치며
본국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 서양 도굴범과 더욱 강력해지는 쇄국정책
18세기 중엽이 되면 사양인들은
현지인들의 저항 때문에
지질 조사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보다 쉽고 빠른 방법으로
무덤 도굴을 생각하게 된다.
"황금의 나라 조선에 대한 글에서 보면
수많은 황금들이 부장품으로
매장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음?"
이왕이면 커다란 무덤을 파보는거야."
때문에 당시 서양인들에게
왕릉은 약탈의 1순위로 떠오르게 된다.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다.
오페르트
"듣자하니, 흥선대원군 이 사람이
그리도 천주교인들을 못살게 굴었다지?
잘됐네. 나중에 변명거리도 될 수 있고.."
그랬는데 오페르트는 뜻대로 안된다.
오페르트
"아놔, 왜 이렇게 묘지 안이 단단함?
삽질 가지곤 어림도 없겠네."
결국 포기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대원군의 쇄국정책만 더욱 확고해진다.
사실 이보다 2년 앞서 있었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도
보복에 있었다지만,
진짜 목적은 평양의 왕릉을
도굴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8세기 초,
한번도 조선 땅에 와보지도 않고
줏어들은 얘기만으로 견문록을 썼던
한 프랑스 신부 때문에
뒤 알드
서구인들은 저마다 낚여서
황금을 얻기 위해
그렇게도 무리하게 도발했던 것이고,
그에 따른 반발로,
조선 지배층들의 쇄국정책 입지만
더욱 확고해졌던 것이다.
조선은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금의 채광을
법으로 금지하는가 하면
서양인들의 약탈심을 유발시키지 않도록
해안가 섬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소위 '공도 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그 결과 조선은
모든 해상권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압권이었던 사건은
1875년 운요호사건이었다.
운요호가 부산과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조선 사람들은 뱃전에 보이는
거대한 대포를 보고는 겁에 질렸지만
실은 그 대포는 실물이 아닌 그림이었다.
그래서 정체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일본 해군은 해안에서 멀찌가니 떨어져
조선의 포대를 위협했던 것이다.
울릉도의 공도정책
● 태종의 공도정책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를 점령한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당시 사료 기록은 이렇다.
지증왕
"듣자하니 우산국 사람들은 사납지만
우둔하다고 하는데, 무슨 묘안이 없을꼬?"
이사부
"사자 모형을 만들어서 겁을 주면
스스로 항복할겁니다."
그랬는데 과연 그랬다.
하지만 이후로 울릉도는 스리슬쩍 다시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이뤘고,
고려 왕조가 세워지자
고려에 조공을 바치면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11세기 경
여진족 해적들이 대거 울릉도로 쳐들어오자
울릉도는 쑥대밭이 되었고,
이때 많은 울릉도 유민들이
고려 땅으로 피신해 오게 되었다.
울릉도민
"살려주삼"
그 뒤로 여진족의 금나라가 망하자,
유민들은 다시 울릉도로 돌아가게 됐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울릉도는 고려의 영토로 복속되게 되었다.
또 고려 후기가 되면,
권문세족의 수탈이 날로 심해지자
많은 고려 백성들이 세금과 병역을 피하기 위해
울릉도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되었다.
당시에는 왜구의 출현으로 나라의 근심이 깊었다.
"전하, 근자에 왜구들이
울릉도를 약탈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태종
"어허, 그넘들이 그런 외딴섬까지 쳐들어갔단 말인가?
벼룩에 간을 빼먹을 넘들이구나."
태종
"뭔데?"
왜구와 결탁하여 해적질을 돕게 된다면
엄청난 화근이 될겁니다."
태종
"그렇구나. 근자에도 우리 백성들이
왜구를 사칭한 가왜(假倭)를 조직해서
해안마을을 도륙질하는 경우가 있다던데,
분명 그리 될 수도 있겠어." ☞ 참고
"그래서 말인데, 이들 울릉도 주민들을
죄다 육지로 이주시키고
앞으로 울릉도를
무인도로 만드시는건 어떨런지요."
태종
"옳거니. 그리하라!"
그렇게 해서 조선시대에 울릉도에는
'공도정책'이 실시되게 된다.
● 어부 안용복, 울릉도를 찾아오다
이후로 울릉도는 공식적으로 무인도가 되었다. ☞ 참고
"이건 마치 도둑이 무서워서
살던 집을 버리고 간 격인데."
"그러게, 신라 장군 이사부 때의
그런 패기들은 다 어디 가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섬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17세기 초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울릉도를 찾은 사람들이 몇몇 있었으나
이미 들어와 살고 있던 왜인들에게
곧 내쫓기게 되어 정착할 수가 없었다."
"현재 울릉도는 완전히
왜인들에 의해 점령되어버렸다"
아예 일본 막부에서
일본인들에게 울릉도의 삼림채벌권과
조업권을 내어주는 일까지 발생했다.
"아놔, 공도정책인지 뭔지 하는 바람에
완전 일본 땅 다 됐네!"
그랬다.
만약 안용복이라는 어부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현재 울릉도는
일본 땅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때는 1693년(숙종 19년)의 일이다.
안용복은 울산 출신의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
안용복
그런데 울릉도에 도착해보니
이미 많은 일본 어부들이 있었고
그들은 조업권을 두고 조선 어부들에게 항의했다.
참고로 부산 태생 안용복은 어렸을 적부터
초량왜관에서 뱃사공으로 일을 해서
일본말에 능통했다.
안용복
"봐라! 문디자슥들,
느그 왜 남의 땅에 와서 고기잡고 있노?"
이 섬은 일본의 영토무니다!"
이렇게 실랑이가 오가는 가운데
결국 일대 육박전이 벌어졌고,
결국 쪽수에서 진 조선 어부들 중
안용복과 박어둔은 함께 돗토리현 호키라는 곳으로
인질로 끌려가게 된다.
호키 태수에게 강력 호소했다.
안용복
"마, 보소! 조선사람이 조선땅에
들어간건데 우예 그럽니꺼?"
호키 태수
"정말 거기가 니들 땅임?
막부에 물어볼테니깐 잠깐만 기둘려."
호키 태수
"만약 뻥이기만 해봐라.."
이랬는데..
곧 막부에서 전갈이 왔다.
호키 태수
"어라? 울릉도 땅이 니들땅 맞았구나."
왜 이리도 일본은 순순히 물러난 것일까?
사실 당시 일본 막부에서는
설마 조선이 울릉도 같은 섬에 신경이나 쓸까 싶었는데
다짜고짜 울릉도 얘기가 나오니,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쇼군
"요즘 조선과는 사이가 좋아져서
그동안 군사적 위협도 많이 줄였는데
괜히 이런거 가지고
분란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그래서 호키 태수는
안용복 일행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준다.
호키 태수
"미안, 내가 부산까지 데려다 줄게."
그렇게 9개월만에 조선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 어부 안용복, 상은 커녕 벌을 받다
귀국한 안용복에게
돌아오는 조치는 황당했다.
라고 포상을 주지 못할 망정
곤장 100대를 쳤다.
동래부사
"아니, 이넘들이 감히 국경을 넘어갔어?"
그리고 안용복의 일은
곧 조정으로 장계가 올려졌다.
숙종
"소식을 듣자하니, 근자에 울릉도에
왜인들이 난립하고 있다는데."
신하
"그런 일이 있었는지 꿈에도 몰랐는데
참으로 황당한 일이옵니다."
즉 안용복 때문에
그제사야 조선의 정치인들은
그동안 영토의식이 희박했던
울릉도라는 섬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신하
"앞으로 왜인들의 불법 채집과 조업을 못하게
막아야 하옵니다."
숙종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리고 일본 막부는 공식적으로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게 된다.
쇼군
"앞으로 우리 어민들이
그쪽으로 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말 뿐이었다.
조선 정부 역시
그걸 확인할 방법이 묘연했다.
그랬는데 이번에도 안용복이 나섰다.
때는 1696년 3월이었다.
안용복이 이끈 조선 어민 160여명은
다시 울릉도 일대에서 고기잡이를 하러 갔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역시나 일본 어민들이 와있었다.
"저것들이, 누굴 핫바지로 보나."
빡친 안용복은 정식으로 찾아가 따져보기로 한다.
"마, 아서라.
니 그라다 걸리면 또 디지게 맞는다."
안용복
"마 개안타.
내사마 분한건 몬 참는다."
그렇게 안용복은 정식으로 따지기 위해 관복을 입고
조선 관리로 위장해서 호키 주로 찾아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조선 관리가 아님이 들통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조선으로 송환되고 만다.
동래부사
"상것 주제에 양반의 흉내를 내는 것도 모자라서
감히 불법으로 월경을 해?"
안용복은 다시 곤장 100대를 맞고
끝내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유배형에 처해진 뒤로
그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다.
● 겨우 찾아온 울릉도
그 후로도 200년 동안
조선은 끝까지 공도정책을 고수하게 된다.
물론 그 사이에
일본 어민들이 제집처럼 들어와
삼림을 베어가고,
어자원을 쓸어갔던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울릉도를 인식하게 된 것은
열강들의 영토침략이 본격 가동된
19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1882년 고종은 무관 이규원을 불렀다.
고종
"생각해보니 울릉도가 걱정일세.
거기가 요즘 어떤지 함 조사해보도록.."
이규원
"넵."
그렇게해서 이규원은
울릉도 일대를 조사하게 되었다.
고종
"그래, 가보니 어떻던가!"
이규원
"큰일이옵니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곧 일본에 빼앗길듯 싶습니다."
고종
"아니, 어떻길래?"
이규원
"지금 섬에서는
일본인 수백명이 산림을 무단으로 벌채하고 있고
인근의 물고기를 싹쓸이 하고 있습니다."
이규원
"또 아예 섬 내부에는
일본국 송도(松島)라는 팻말까지 세워져 있었습니다."
고종
"정말 큰일이구나."
이렇게 영토 침탈의 위기의식을 느낀 고종은
부랴부랴 대책을 세웠다.
고종
"울릉도에 살 사람들을 모집해서
그곳에 앞으로 살도록 하게하라."
이때가 1884년이었으니
어언 468년간 이어져온
조선의 공도정책이 폐지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19세기 말이 되면
조선은 대대적으로 서양 열강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이때 엘도라도의 꿈을 위해
많은 서양 광산업자들이 조선 땅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곧 그들은 소문이 과장된 것임을 깨달았고
서서히 조선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던 것.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은
결국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묵시적 방조자가 되도록 만든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먹게 그냥 내버려뒀겠음?"
결국 조선은 바다를 버렸기 때문에
근대 문명과 제대로 교류할 수가 없었고,
내부적으로는 소중한 영토와 영해를
크게 날려먹을 뻔했고,
또 결국엔 나라를 잃어버리게 됐다.
참고 문헌 :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읽기 (신복룡), 세상사람의 조선여행 (규장각), 조선왕조실록
출처 - http://blog.naver.com/alsn76
결국엔 안용복이 지킨 땅도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라는 사실....ㄷㄷ
이걸 보면 일본이 왜 무인도였던 독도를 자신들의 섬으로 편입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는 무인도엿으니 그들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만은 볼 수 없는 조선의 뻘짓입니다.
아..지금의 대한민국과 조선과 별 다를바 못느끼는 것은 저만 그런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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