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울릉도와 독도
● 울릉도는 어떻게 우리 땅이 되었나?
울릉도는 1416년부터 시작해서 468년간
한국인이 살지 않았던 섬이었다.
그렇다고 무인도는 아니었다.
일본인 어부들이 오고 가면서
고기도 잡고, 벌목도 하던 곳이었다.
어라?
분명 삼국시대부터
울릉도는 우리의 영토가 아니었나?
물론 우리 영토였다.
일본 스스로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데스"
그런데 울릉도에 조선인들이 살지 않았던 까닭은
조선의 케케묵은 공도정책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6세기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를 점령했지만 점령을 했을 뿐, 완전히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사부 11세기까지 울릉도는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고려 왕조가 세워지자 고려에 조공을 바치면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진족 해적들이 대거 울릉도로 쳐들어오자 울릉도는 쑥대밭이 되었고,
▲ 여진족은 흔히 기마민족으로 알려졌지만, 해양활동도 활발했다. 이때 많은 울릉도 유민들이 고려 땅으로 피신해 오게 되었다.
울릉도민 "살려주삼." 그리고 13세기 여진족의 금나라가 망하자, 유민들은 다시 울릉도로 돌아가게 됐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울릉도는 고려의 영토로 복속되게 된다. 특히 고려 후기가 되면, 권문세족의 수탈이 날로 심해졌기 때문에 많은 고려 백성들이 세금과 병역을 피하기 위해 울릉도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되었다. 당시에는 왜구의 출몰로 나라의 근심이 깊었다.
"전하, 근자에 왜구들이 울릉도를 약탈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태종 "어허, 그넘들이 그런 외딴 섬까지 쳐들어갔단 말인가? 벼룩에 간을 빼먹을 넘들이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사옵니다."
태종 "뭔데?"
"울릉도 주민들이 왜구와 결탁하여 해적질을 돕게 된다면 앞으로 엄청난 화근이 될 겁니다."
태종 "그렇구나. 근자에도 우리 백성들이 왜구를 사칭하여 가왜(假倭)를 조직해서 ☞ 참고 해안마을을 도륙질하는 경우가 있다던데, 분명 그리될 수도 있겠어."
"그래서 말인데, 이들 울릉도 주민들을 죄다 육지로 이주시키고 앞으로 울릉도를 무인도로 만드시는 건 어떨는지요."
태종 "옳거니. 그리하라!" 그렇게 해서 조선시대에 울릉도에는 '공도정책'이 실시되게 된다.
이후로 울릉도는 공식적으로 무인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섬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17세기 초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울릉도를 찾은 사람들이 몇몇 있었으나 이미 들어와 살고 있던 왜인들에게 곧 내쫓기게 되어 정착할 수가 없었다."
"현재 울릉도는 완전히 왜인들에 의해 점령되어버렸다" 아예 일본 막부에서 일본인들에게 울릉도의 삼림채벌권과 조업권을 내어주는 일까지 발생했다. |
때는 1693년(숙종 19년)의 일이다. 안용복은 울산 출신의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런데 울릉도에는, 이미 많은 일본 어부들이 있었고 그들은 조선 어부들을 보자 곧 항의를 했다.
"여기는 일본의 영토이무니다!"
안용복 "문디자슥들, 여그는 우리 땅이다. 니들이 와 남의 땅에 와서 고기를 잡고 있노?" 참고로 부산 태생 안용복은 어렸을 적부터 초량왜관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일본말에 능통했다. 그렇게 실랑이가 오고 가다 육박전이 벌어졌고,
결국 쪽수에서 진 조선 어부들이 일본 본토(돗토리현 호키)로 끌려가게 되었다.
인질이 된 안용복은 화가나서 따졌다.
안용복 "마, 보소! 조선사람이 조선땅에 들어간건데 우예 그럽니꺼?"
호키 태수 "정말 거기가 니들 땅임? 막부에 물어볼테니깐 잠깐만 기둘려." 그랬는데, 곧 막부에서 전갈이 왔다.
호키 태수 "어라? 울릉도 땅이 니들땅 맞았구나." 사실 당시 일본 막부에서는 설마 조선이 울릉도 같은 섬에 신경이나 쓸까 싶었는데 다짜고짜 울릉도 얘기가 나오니,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쇼군 "요즘 조선과는 사이가 좋아졌는데, 이런 일로 또다시 분란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안용복 일행을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게 되었고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조선 정부에게 통고하면서 사과했다. 하지만 귀국한 안용복에게 조선 정부는 곤장 100대로 다스렸다.
동래부사 "아니, 이넘들이 감히 국경을 넘어갔어?" 한편 조선정부는, 일본에서 난데없이
"울릉도는 조선 땅이 맞스무니다." 라고 나왔기 때문에 어리둥절하다가도..
숙종 "맞아! 거기가 우리 땅이었지." 곧 일본 정부에 이렇게 요구했다.
숙종 "앞으로 울릉도에 왜인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주삼." |
"아놔!"
고종
이규원
고종
이규원
이규원
이규원
고종
▲ 울릉도 초기 개척민의 집 (1884년)
고종
● 독도는 과연 우리 땅이었나?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평소 모두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열을 올리지만,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 물어보면
제대로 설명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단적인 자료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흔히 고지도나 고문서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되기는 힘들다.
예컨대, 16세기의 '팔도총도' 등을 보면서
19세기 '해동여지도' 등을 보면서
우리는 울릉도 옆에 있는 섬을
쉽게 '독도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게 '죽도'가 아니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물론 죽도가 아닌,
독도일 가능성도 높다는 주장도 있다.
대표적인 게, 고지도에는 독도로 추정되는 섬에
산봉우리가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 죽도에는 산봉우리가 없는데, 독도에는 봉우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의 섬은 독도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증거다'라고 내세우기에는
뭔가 좀 옹색하지 않는가!
게다가 이런 주장에는, 반박자료도 여럿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우산, 무릉의 두 섬은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 |
그렇다면 지도에 그려진 섬이
죽도인지 독도인지는 더욱 불분명해진다.
가까운 거리라면 죽도가 맞겠지만,
청명한 날에 보이는 섬이라면 독도가 아니겠는가!
흔히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라고 우리는 배우고 있지만, 엄밀히 지리학적, 지질학적으로 따져보면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가 될 수 없다. 울릉도~독도간 거리는 87km로 이는 서울~원주, 서울~천안 간의 거리와 비슷하다.
전라남도 완도에서 제주도간의 거리다. 그런데 완도를 아무도 제주도의 부속도서라고 하지 않는다.
지질학적으로 독도는 해저에서 화산 분출로 치솟은 화산의 봉우리로서 울릉도보다 200만 년 먼저 생성된 화산섬이다.
지질학적으로 볼 때도 부속도서라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하지만 울릉도에서 독도는 육안으로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그렇기는 하다.
다만 울릉도에서 독도 간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해발 130m 이상 위로 올라가야, 맑은 날에 육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부산 ~ 대마도 거리보다 1.74배 더 먼 거리이기 때문에 부산 앞바다에서 대마도를 보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
서울~월미도 거리보다는 2배 이상의 거리이기 때문에 북한산 정상에서 인천 앞바다를 보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볼 수는 있지만, 보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게다가 조선은 468년 동안이나 섬을 비워두고 1884년부터에야 울릉도에 사람이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 100년 전 울릉도 개척민의 집 인문학적으로도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가 되기 힘든 이유다. (다만 1900년도 칙령을 발표하면서 독도는 행정적으로 울릉도의 부속도서가 된다.) 게다가 국제적인 시각도 역시,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전후 일본의 영토를 협의하는 연합국의 문서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따로따로 기재했었다. |
18세기 조선 조정에 보고된 박석창의 '울릉도 도형'에는
울릉도와 함께 우산도가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서 우산도는,
'대나무밭으로 우겨져 있는 섬'으로 기록되어 있다.
밭이 있는 섬이라면 독도가 아닌,
더욱 죽도에 가깝다.
고로 우리나라 고지도와 고문서에 소개된 자료를 가지고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가 빈약하다.
때문에 독도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이런 부분들이 우리가 가진 '약점'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의외로 일본인들이 가진 고지도와 고문서들 중에는
'독도는 조선 땅이다'라는 식의 자료들이 여럿 출토되고 있다.
17세기 후반 안용복 사건 이후로,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라고 공식 인정했던 일본은
간헐적이기는 했지만,
울릉도에 도해하는 어민들을 제제하고 있었다.
때문에 어쩌다 단속하는 날,
재수 없이 걸려들면 목이 날아가는 식이었다.
1836년에도 울릉도로 무단 도해하다가
붙잡힌 어부의 처형 기록이 남아있는데,
당시 처형기록에는 친절하게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바로 이러했다.
사실 당시까지, 조선 정부가 독도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일본이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887년 일본 정부는,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하부기관(내무성)에 직접 하달하기도 했다.
이때도 지도가 그려진다.
서양인이 제작한 지도를 토대로 했기 때문에, 그 모습은 꽤나 정교해진다.
얄짤없이 독도가 맞다.
1894년 일본이 제작한 조선국지도에서도
독도를 조선의 영토에 포함시키고 있다.
● 독도는 어떻게 일본 땅이 되어버렸나?
일본은 원래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불렀고
독도를 마츠시마(松島)라 불렀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명칭이 뒤바뀌게 된다.
일본인 스스로 도해금지법으로
울릉도, 독도에는 비밀리에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에
▲ 독도에서 조업을 하고 있는 일본 어부들 (1936년)
일반인들에게 인지도가 낮았던 탓이다.
"다케시마? 마츠시마?
모두 처음 듣습무니다."
그러던 중 19세기 후반, 서양 함선이 측량 과정 도중에
'마쓰시마'와 '다케시마' 명칭을 바꿔쓰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서양의 지도를
일본 해군성이 역수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울릉도는 마츠시마,
독도는 다케시마가 된 것이었다.
"일본인들에게도 워낙 듣보잡 섬이었던 지라.."
조선 사람들이 울릉도, 독도를 거의 모르고 살았듯이
일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울릉도? 독도?"
하지만 정작 독도의 국제적 명칭은
'리앙쿠르 암초'로 알려지게 된다.
18세기 중엽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독도에 난파당한 뒤 붙여졌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섬이 아닌 암초로 명칭 된 것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바위섬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근대 일본에서는
한동안 독도를 '리앙꼬루도'라 부르기도 했었다.
"리앙꼬루도는 우리 땅이 아니무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조선의 영토라고 해주고 있었고,
서양의 지도를 통해서도
그 존재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당시 대한제국)은 스스로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하기로 했다.
바로 1900년, 대한제국 칙령에 의해서였다.
이때 독도의 이름은 '석도'였다.
고종
"석도(石島)는 앞으로 울릉도와 함께
강원도에서 관할하라능."
당시 대한제국의 칙령이 얼마나
국제적으로 효력이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한제국은
서양 여러 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었다.
때문에 정부의 공식적인 칙령이라면,
국제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철저히 무시된 모양이다.
오히려 일본은 러일전쟁 도중인
1905년에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해 버린다.
"주인 없는 땅은 먼저 선점하면 임자데쓰!"
이때 재빨리 섬을 차지했던 이유는
물개잡이를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여기 섬에서 물개가 많이 서식하무니다."
▲ 독도의 물개 포획 장면
그리고 등대도 세워진다.
▲ 일제에 의해 세워진, 독도의 등대
이럴때 조선은 무엇을 했나?
왜 반박하지도 못했을까?
사실 1904년부터 조선은 더 이상 나라가 아니었다.
러일전쟁으로 주둔한 일본에 의해
한일의정서가 강제로 체결되었고,
일본인 고문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1905년,
일본이 겨우 조그만 바위섬을 가져가겠다는데
딱히 뭐라고 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러일전쟁 기간 중, 일본이 조선에 행했던 일들은 다음과 같았다. ① 고려왕릉을 도굴했다. ② 금광·어업권·포경권·인삼밭을 강탈해갔다. 울릉도에서는 무단 벌목도 이루어졌다. ③ 화폐정리 사업이 실시되어 제일은행권 지폐가 강제 발행되었고, 그렇게 찍어낸 돈으로 경부선이 만들어 진다.
하지만 이때 찍어낸 지폐는 일본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일본에서는 통용이 안됐다.
④ 재정·우편·전신·전화의 관리를 일본인이 맡는다.
곧 조선의 통신을 일본이 장악하게 되어, 외교문서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도 어렵게 된다.
⑤ 토지의 착취가 시작된다. 일본은 당시 우리나라 땅의 1/4이 황무지라고 조사했다.
그러자 국민들은 땅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하고 있었다.
|
▲ 1946년 연합국이 합의한, 행정구획도
▲ 맥아더 러인
▲ 당시 일본의 어선들
▲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시볼드
애치슨
애치슨
애치슨
애치슨
참고로, 러스크 서한은 현재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의 주요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문서다.
일본 외교부에서 10개국어로 번역하여 돌리고 있는 문서다. 그런데 러스크 서약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러스크는 강화회담의 주요 미국 대표도 아니었고, 그의 견해가 미국을 대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극동 보좌관에 불과한 듣보잡의 서한서를 가지고 국제법상 효력을 주장할 수는 없는 일." |
이승만
▲ 당시 우리나라 어촌 : 부산항 용당포
'밀어붙이기식 방법'은 이승만의 전매특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주도하면서, 국회의원 50여명을 버스 통째로 강제로 끌어갔던 것이나
1953년 반공포로들을 예고도 없이 풀어주면서, 국제적인 이슈를 낳게했던 것이나
모두가 이승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
이승만
이승만
이승만
▲ 이승만 라인에 시위하는 일본인들
이승만
해안경비정으로 쓰기도 했다.
▲ 61년 11월 비밀리에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김종필
김종필
김종필
김종필
출처 - http://blog.naver.com/alsn76/2202359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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