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대 이승만 [李承晩]
1875(고종 12)∼1965. 독립운동가·정치가·대한민국 초대대통령.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황해도 평산출신. 경선(敬善)의 아들이다.
1894년(고종 31)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 이듬해 8월 배재학당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같은해 10월 일제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국모살해한 원수를 갚고 국왕을 구출하여 친일적인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지명수배를 당하였다.
1896
년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에서 돌아와 협성회(協成會)·독립협회 등을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개화·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당한 뒤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의 주필로 활약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사상 고취와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워싱턴·하와이 등지에서 항일투쟁과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945
년 광복을 맞아 이해 10월에 귀국,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당선되어 초대국회의장에 선출되고, 내각책임제 헌법초안에 강력히
반대하여 대통령제로 헌법이 제정되도록 하여 그해 7월 초대대통령에 당선되어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취임하였다.
그뒤 강력한 반공·배일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외교를 견지하였다.
6·25
때에는 유엔군의 도움을 얻어 공산군을 격퇴하였고, 동란중 국토가 분단된 상태에서의 휴전협상에 강력히 반대하였으며, 1953년
6월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 애국포로 2만7000여명을 유엔군의 양해 없이 단독으로 석방하였다.
같은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한미양국은 휴전 후에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였다.
6·25로 정부가 부산에 피란해 있던 1951년 12월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하여 자유당을 창설하였으며, 다음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강압적으로 통과시키고 4년임기의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1954년 국회는 이승만에게 대통령 3선금지를 면제해주는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을 통과시켰다.
1956년의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申翼熙)가 투표 며칠 전에 사망하여 투표권자 56%의 지지를 얻어 세번째 당선되었다.
1960년 3·15정·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趙炳玉)이 선거 전에 사망하여 4선이 확실해졌으나 자유당의 부통령후보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대적인 부정이 감행되었다.
이와같이 장기집권을 위하여 여러 차례 불법적인 개헌을 하고, 정적과 야당을 강압함으로써 정치발전에 지장을 주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융통성 없는 강경책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3·15부정선거와 자유당 독재로 4·19를 초래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자유당정권이 붕괴되어 그해 5월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유해는 하와이에서 국내로 옮겨와 가족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재임 : 1948.7~1960.4
초대 이승만 1948 ~ 1952(간 선=국회에서 선출).
제 2 대;-이승만 1952 ~ 1956(직 선).
제 3 대;-이승만 1956 ~ 1960(직 선).
4대 윤보선 [尹潽善]
출생 : 1897년 8월 26일 충남 아산~1990.7.18
정치가.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입후보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의원내각제 실시로 장면을 내각수반(총리)에 임명.
그러나 혁명 후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함.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을 창당하여 그 해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하였다.
제 4 대;-윤보선 재임 : 1960.8~1962.3 (간 선=국회에서 선출).
5~9대 박정희 [朴正熙]
1917∼1979. 군인·정치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제5·6·7·8·9대 대통령. 본관은 고령(高靈 ; 고령박씨는 밀양박씨의 한 분파임). 호는 중수(中樹).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8년5개월간을 집권하였다.
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한·일문제를 둘러싼 여야와 정부·국민간의 공방은 ‘6·3사태’ 등 한때 정국의 위기까지 불러일으켰으나 박정희정부는 반대의견을 물리치고 일을 성사시켜 결국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한·
일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자금도입과 기타 차관 등을 통하여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도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고성장·수출드라이브·산업기지건설 등을 통하여 국정에 자신감을 가졌으며, 이와 함께 점차 독재성향을 띠어가기 시작하였다.
한일회담 타결, 월남파병 등으로 미국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박정희는 강한 권력욕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1968년 3선개헌으로 나타났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한 후, 이 헌법에 따라 제8대대통령에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막강한 것으로 보장해줌으로써 박정희에게 독재체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독재적인 통치에 의해 박정희정부는 이 기간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도성장이었고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빈부격차를 가속화시켰고, 황금만능사상으로 사회갈등과 함께 국민정신문화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한
편,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국가안보면에서 빈틈없는 태세를 구축한 것은 박정희의 공으로 기록될만하다. 박정희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에 힘써 한동안 남북적십자회담·남북조절위원회회담 등을 열었고, 남북간 밀사교환을 이루었으나 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는 1979년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사태(釜馬事態)’가 절정을 이루던 때,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측근의 한 사람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쏜 총탄을 맞고 죽었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도 끝났다.
재임 : 1963.12~1979.10
제 5 대;-박정희 1963 ~ 1967(직 선).
제 6 대;-박정희 1967 ~ 1971(직 선).
제 7 대;-박정희 1971 ~ 1972(직 선).
제 8 대;-박정희 1972 ~ 1978(간 선=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선출).
제 9 대;-박정희 1978 ~ 1979(간 선= 동일.
10대 최규하 [崔圭夏]
출생 : 1919년 7월16일 강원도 원주~2006.10.22
정치가·외교관.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면서 외교관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9년 외무부차관이 되었고 1967년에는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1975년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1979년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그해
제 10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8개월만에 사임하였다.
제 10 대;-최규하 재임 : 1979.12~1980. 8 (간 선=동일).
11~12대 전두환 [全斗煥]
출생 :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
군인·정치가.
신군부가 12·12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을 이루었으며,
재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국민과의 약속을 이행하였으나,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재임 : 1980. 9~1988. 2
제 11 대;-전두환 1980 ~ 1981(간 선=동일).
제 12 대;-전두환 1981 ~ 1988(간 선=대통령 선거인단이 선출).
13대 노태우 [盧泰愚]
출생 : 1932년 12월 4일 대구 공산면 ~
군인·정치가. 내무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실시. 제13대 대통령.
88서울올림픽 개최. 5공청문회 개최.
대통령 재직중 북방외교의 성공으로 러시아, 중국과의 국교를 수립하였다.
무궁화대훈장, 보국훈장 국선장, 을지무공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제 13 대;-노태우 재임 : 1988.2~1993.2 (직 선).
14대 김영삼 [金泳三]
출생 :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
한국의 정치가. 9선의원이었으며 1985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맡았고,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1990년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어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을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
집권 말기에 아들 김현철의 비자금 사건으로 곤욕.
점점 쓰러져가는 경제난을 바로 잡지 못해 결국 IMF 관리 요청.
제 14 대;-김영삼 재임 : 1993. 2~1998. 2 (직 선).
15대 김대중 [金大中]
출생 : 1926년 1월 6일 전남 신안 ~2009.8.18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성공으로 6.15공동성명 발표.
그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집권 말기에 아들 3명의 비리 의혹.
제 15 대;-김대중 재임 : 1998. 2~2003. 2 (직 선).
16대 노무현 [盧武鉉]
출생 : 1946년 8월 6일(음력) 경남 김해 ~2009.5.23
제16대 대통령.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 뒤
5공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퇴임 후 고향인 봉하마을에 귀향하였으나 재임중 친인척 비리로 조사받다가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서거하였다.
제 16 대;-노무현 재임 : 2003. 2 ~ 2008. 2 (직 선).
17대 이명박 [李明博]
출생 : 1941년 12월19일 일본 오사카 ~
제17대 대통령. 고려대학교 상과대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현대건설에 입사해 단기간에 최고경영자에 올랐다.
제14·1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한나라당 후보로 2002년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어
서울시장을 지냈으며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되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제 17 대;-이명박 재임 : 2008.2 ~ 2013. 2 (직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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