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싸졌냐 하는 질문에는 한 수입업자가 킹크랩 250톤을 한꺼번에 사재기했다가 팔리지 않자 원가에 풀어 싸게 팔리고 있다고들 말한다 하더라....
*뉴스에 따라서는 2천톤이라는 말도 있다 - 이것으로 인해 다들 말이 조금씩 다르기에 하는 추측입니다만..출처가 불분명한 불확실한 정보라는 생각됩니다.
이것이 바로 시장경제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저런 뉴스기사들을 신용한다면 단순히 독과점의 폐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린 사실 독과점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중고등학교때 배우는 소설속의 그 분.
바로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
허생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밑의 더보기를 눌러보자.
1. ‘허생전’의 저자는 누구일까?
‘허생전’은 조선시대 실학자인
박지원(1737~1805)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 10권 중 옥갑야화(玉匣夜話) 부분에 실려 있는 풍자소설이다. ‘열하일기’,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등을 지은 박지원은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파(北學派)로 불리어지며 조선보다
발전된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實學)을 강조한 인물이다.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당시 집권층인 사대부의 허위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2. ‘허생전’의 줄거리는?
허생은 묵적골에 사는 양반으로 매우 가난하였지만 과거도 보지 않고 집안일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글만 읽을 뿐이었다. 이에 하루는
화가 난 부인이 허생을 질책하자 허생이 집을 나오게 된다. 집을 나온 허생이 배짱 좋게 서울 제일의 부자인 변씨를 찾아가 돈
만냥을 꾸고자 청하니 변씨는 허생의 됨됨이를 높이 평가하고 이름도 묻지 않은 채 만 냥을 서슴없이 빌려준다. 허생은 빌린 돈
만냥을 가지고 과일과 말총 등을 매점매석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된다. 이후 한 늙은 사공의 안내로 어느 빈 섬으로 들어간 허생은
때마침 일어난 군도(群盜)를 이끌고 섬에 이상국(理想國)을 건설한다. 이상국이 안정된 후 섬을 나온 허생은 변씨에게 이전에 빌린
돈을 열배로 갚는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면서 변씨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어느 날 변씨와 잘 아는 사이인 이완 정승이
변씨로부터 허생의 이야기를 듣고 쓸 만한 인재를 찾고자 허생의 집을 찾아간다. 허생은 함께 이야기를 하다 사대부를 비판하면서
이완을 꾸짖는다. 그리고 이완을 죽이려고 하자 이완은 급히 뒷문으로 도망친다. 이튿날 이완이 다시 찾아가보니 집은 텅 비어 있고
허생은 보이지 않았다.
3. 독점은 ‘허생전’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중 략)
허생은 만 냥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안성으로 내려갔다. 안성은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삼남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추, 밤, 감, 배며 석류, 귤, 유자 등속의 과일을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허생이 과일을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못 지낼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과일을 팔았던 상인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 냥으로 온갖
과일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그는 다시 칼, 호미, 포목 따위를 가지고 제주도에 건너가서 말총을 죄다 사들이면서 말했다. “몇 해 지나면 나라 안의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지 못할 것이다.”
허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 가서 과연 망건 값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중 략)
(독점이란?)
위 글을 읽어보면 허생이 독점시장의 특성을 이용하여 많은 돈을 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독점이란 무엇일까? 독점이란 재화나 서비스의 공급이 오로지 한 기업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재화나
서비스를 시장에 독점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업(독점기업)은 경쟁해야 할 기업이 따로 없으므로 공급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있다. 결국 독점기업은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가격수용자(price taker)가 아닌
가격을 직접 설정하는 가격형성자(price maker)로 역할한다. 따라서 독점기업은 시장에 충분한 경쟁이 있을 때 형성되는
가격(완전경쟁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받으려 할 것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독점기업의 이윤이 완전경쟁시장의 기업들이 누리는 이윤보다
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허생은 어떻게 독점시장의 특성을 이용하고 있을까?)
위 글에서 허생은 대추, 밤, 감, 배, 석류, 귤, 유자 등의 과일을 평상시 가격의 두 배로 모두
사들였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과일들을 모두 산 것이다. 이것은 허생이 과일시장의 유일한 공급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허생은 과일시장의 독점적 공급자가 된 것이다.
과일의 독점적 공급자가 된 허생이 시장에 과일을 공급하지 않게 되자 시장의 과일 가격은 급속히
올랐다. 잔치나 제사에 쓸 용도로 과일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요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과일의 공급은 허생이 제한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허생은 독점력을 이용하여 열 배 이상의 가격을 받고 과일을 팔 수 있었던 것이다. 허생이 말총을 모두 사들여
망건 값을 오르게 한 후 큰 이익을 본 것도 마찬가지 사례라 할 수 있다.
(허생이 누리는 초과이윤은 어디서 온 것일까?)
허생에게서 다시 10배의 가격을 지불하고 과일을 사간 상인들은 분명 그 과일들을 자신들이 사간
가격(10배) 이상으로 소비자들(잔치나 제사에 쓰려고 과일을 사는 사람들)에게 다시 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인들도 과일을 팔아
이윤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소비자들은 원래 싸게 살 수 있었던 과일을 단지 독점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11배 혹은
12배 등의 가격을 지불하고 사야만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독점시장이 형성되면 소비자들의 후생은 감소하게 되고 감소한 후생의
일부는 허생과 같은 독점 공급자에게 이전되게 된다.
일반적으로 독점시장의 가격은 완전경쟁시장의 가격보다 높으며, 독점시장의 공급량은 완전경쟁시장의
공급량보다 적게 된다. 그리고 독점가격은 독점기업에게는 최대의 이윤을 보장해주지만 소비자들은 경쟁시장의 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하므로 후생의 손실을 보게 된다.
(독점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진입장벽을 없애 경쟁을 활성화시키거나 외국과의 자유무역을
활성화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만일 위의 글에서 조선의 과일시장이 대외에 개방 되어 있어 가까운 청나라나 왜국에서
자유로이 과일을 수입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허생이 공급을 독점하여 과일가격이 급격히 상승하게 되었을 경우, 주변나라인
청나라나 왜국의 과일 공급자들이 높은 이윤을 쫓아 조선에 과일 수출을 늘렸을 것이다. 그리고 늘어난 과일 공급은 조선의 과일
가격을 다시금 떨어뜨렸을 것이다. 이처럼 진입장벽이 낮거나 자유무역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단 하나의 공급자가 독점이익을 누리기가
쉽지 않으므로 독점의 폐해를 줄일 수 있다.
또한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독점의 폐해를 규제하는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 공정거래위원회(Fair
Trade Commission)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시장지배적 사업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폐해를 발생시키는 것을 규제하고 있다.
허생을 통해 당시의 사회경제적 불합리를 비판하고자 했던 박지원이 만약 오늘날 살아있었다면 시장주의자가 되어 있지는 않았을까?
[작성 : 한국은행 경제통계국 박기덕 조사역]
아무튼, 21세기의 지금, 이렇게 독과점의 폐해가 일어나는 것은 조금 시대적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은 해본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17세기때와 다를게 없는 것인가!
하지만 처음 가격이 절반이 되었을 때 넷티즌들의 반응은 정말 차가웠습니다.
유명 사이트들을 돌아다녀봐도
'신선도가 중요한 해산물을 매점매석으로 이윤을 얻으려 하다니 바보아님?'
이런 반응이 컷지요
그리고 다들 싸니까 나도 한번 먹어보자 몰리었고
덕분에 지금 다시 가격이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그즉슨 업자는 초반에 샘플 몇개 제공해주고 아주 대대적인 홍보작업을 거쳐, 엄청난 이윤을 창출해냈다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다가 계속 어디있는 지 몰라서 못보던 디카 메모리칩하나를 발견했더니 이게 들어있더군요 ㄷㄷ
아...오랜만이다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난 김에 구글링 결과...
이런 황당한....
한식의 역사나 현대한국의 음식 문화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기껏해봐야 궁중요리 정도나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정말로 옛날 우리 조상들이 뭘 먹고 살았는지, 지금 우리가 먹는 음식들이 어디에서 기원하고, 발전해온
것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음식들의 유래에 대해 온갖 잘못된 정보과 구라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현실.
대표적인 사례 하나만 꼽자면 난 꿀타래를 들겠다.
꿀타래는 꿀과 맥아당을 숙성시켜서 가닥을 늘려 뽑은 뒤 견과류를 안에 넣은 과자다. 주로 인사동, 명동과 같은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 명소에서 한국의 전통 궁중다과라며 팔리고 있다. 그런데.. 이거 정말 궁중에서 먹던걸까? 아니, 전통과자이긴
한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처음 이 꿀타래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곳은
90년대 후반의 인사동이었다. 그리고 이걸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중국에서 봤던 용수당을 들여왔구만..' 이었다. 그렇다.
완전히 똑같은 과자가 중국에 예전부터 있었다. 설탕을 길게 늘려뽑는 모습이 마치 용의 수염과 같다고 해서 용수당(龍鬚糖)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선 이 과자의 기원을 이천년 전까지 소급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그렇게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구라겠지만, 이 과자가 중국에서 생겨났고, 우리나라엔 불과 십여년 전에 들어왔단 것은 확실하다. 처음 저 꿀타래를 인사동에서
판매할 때만 해도 상품명은 꿀타래가 아니라 '용수염'이기도 했고, 꿀타래란 단어가 언론 매체에 처음 등장한 1999년 11월
19일자 동아일보에 나온 기사를 보면 아예 '중국의 호텔에서 시연하는 것을 보고 들여왔다' 라고 확인사살을 해준다.
하
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용수염이란 이름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엔 꿀타래란 이름이 대신 붙었다. 그리고는 궁중과자란 말과 한국의
전통과자란 말이 어느새 추가되었는데,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다. 동시였는지도. 그러더니 급기야는 이 꿀타래는 500년
전에 임금님만 드시던 전통다과이자, 판매하는 상인이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자부심을 느낀다' 라고 말하기까지 하는
물건이 되었다.(2009년 한국일보 기사)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저 꿀타래 장수가 말하는 한국의 문화는 전통의 부재와 거짓말이기라도 한걸까? 예전엔 외국에서 손님이나 친구가
오면 데리고 인사동에 가기도 했는데, 요즘은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들어온 조잡한 기념품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는 광경도 그렇거니와,
꿀타래를 두고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가판대(이젠 한두개가 아니더라..)들을 지나는 것도 부끄러워서 차마 가질 못
하겠다. 그래도 요즘은 중국에 다녀오는 사람도 많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워낙 빨리 퍼지니 꿀타래의 기원이 중국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꽤 있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어떤 경로로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에 대해선 제대로 된 정보가
없어서, 조선 시대 쯤에 궁중에 전래된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업체에 따라서는 꿀타래가 중국의 용수당과 한과를
퓨전해서 만든 거라고 좀 더 나은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꿀타래의 어디에 한과의 요소가 있는건진 전혀 알 수 없다.)
대
체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상인들의 얄팍한 상술 그리고 한국인들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주영하 씨의 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책을 본지 오래되서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전주 비빔밥의 기원에 대해 주영하 씨가 학술 연구를 의뢰받았던 일에 대한 회상이었을 것이다. 비빔밥의 기원이
시장에서 상인들이 간단히 먹던 식사일거라고 발표하자, 지역 상인들이 '최소한 임금님이 드셨다곤 해야 폼이 나지 않겠느냐' 라고
항의했다나 뭐라나. 이런 세태가 문제가 있는건 확실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개선할 수 있을까? 달라지는게 가능하긴 할까? 참
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