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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는 일본에 돌아가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씼고 바로 어제 차를 세워둔 곳에 와서 출발~!


혜영이누나를 운전수로 오게 됩니다.


도착해서 짐을 부칠려고 보니 국제선에서 부치는 곳이 그새 없어져서 -_-


국내선타는 곳까지 가서 우체국에서 짐을 부치고 다시 국제선으로 돌아오는 당황스러운 상황이 연출.

마지막으로 순대국밥을 먹고 돈을 뽑는 다고 현금인출기에서 600만원을 인출했습니다.

수수료가 100만원당 600원으로 3600원이 들었네요

나름 한국이 수수료 싸긴 싸구나 느꼈는 데...


그거에 어머니와 혜영이누나가 엄청 화를 내더군요-_-;;


아니.. 처음부터 일본에 가져간다고 이렇게 빼간다고 했거니만...

궁시렁궁시렁

내가 또 어이가 없어서 한소리 할려다가 마지막가는 길이라고 말았지요ㅋ


일일 한도인 600만원에 걸려 50만원은 한국에 내비둔채 일본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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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어머니의 인생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고 일어나서는 행선지를 정했다

원래는 부여집에 어머니와 형과 셋이 같이 가자고 이야기가 되어있었는 데..

어찌 형은 하루빨리 금융감독원에 가서 아버지의 채무관계를 확실히 알 필요가 있었기에 그쪽으로 가기로 했나보다


가기전에 은행에 들려 내 통장을 만들고 결혼 축의금으로


형에게 100만원

아머니에게 350만원

어머니친척에게 150만원

총 600만원을 받게 됩니다.

오기전에 여행경비를 어머니가 주신다고 해서 50만원을 추가로 받아 650만원을 받았네요


이후 형은 서울로 어머니와 나는 부여로 이동


판암동에 아는 사람이 부여집까지 데려다 준다고 해서 또 차를 타고 이동을 하게 됨.


부여집에 도착해 보니 정말 다 쓰러가는 집이 있었음 ㄷㄷ



이곳에 대충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짐을 풀어봐서 필요한것 혹은 필요없는 것을 골라 쓸데없는 것을 버리고 필요한것을 챙겨싸오는 스킬을 발동.

원래 내가 필요한 것만 뺄 생각이었으나 아버지 유품 대부분을 버리면 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책상과 서랍장등을 다 버리라고 하셔서 낑낑대며 그걸 버리느라 힘들었네요.


정말 형이 여길 같이 왔었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지만 뭐 금감원에 가는 일도 중요 했기에 어쩔수 없었네요


그렇게 나는 짐을 정리하고

어머니와 친구분은 산나물/산과일을 무단으로 따게 됩니다-_-


한참 짐정리를 하던중에 혜영이 누나에게 전화가 와서 부여집까지 온다고 하더군요

주소때문에 한참을 또 헤메다가 간신히 이곳까지 오게 됩니다.

이곳에 합류하고 혜영이누나까지 산과일을 따는 데 동참하고 대전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대전에 와서 어머니 친구분과 같이 고기에 술한잔하고 복용동에 돌아와 잠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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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서 김치찌개에 김/삶은 감자등을 먹고 동사무소로 향함

동사무소에서 인감등록을 하고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음 - 5장 3000원


주민등록등본과 가족관계증명서,기본증명서등은 무료이기에 9부씩 띠었음


심심풀이로 혼인관계증명서도 한장 발급받았음


발급하는 동안 시간이 많이 남아서 아들 주민번호 뒷자리 좀 어떻게 받아볼까 문의를 해보던 중..



어익후야 출생신고가 안되어 있다고 과태료가 부과된다는 말을 들음 ㄷㄷ

영사관에서 출생신고 다 했건만 이건 또 뭔소린지..

등본에도 호적에도 가족관계증명에도 다 올라가 있는 데..


일단 동사무소 직원은 그거랑은 별개라면서 주민번호 뒷자리를 발급받기위해서는 과태료를 내야한다는 말을 들음

어이가 없음-_-


당연하지만 출생증명서등을 내가 지금 가지고 있지도 않고..

일본에 또 날라가서 발급받아 번역본 붙여서 신청하라네

애기 여권도 만들어서 내 신분증 가져오라느니...ㅠ


뭐 암튼 일단 지금 뭘 어떻게 할수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돌아옴


동사무소일이 끝나고 바로 서울을 뜰수 있을 줄 알았건만 어머니는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이모랑 농담따먹기를 하고 있었음

형은 재촉하지도 않고 그냥 시간 보내고 있고...

보다못해 일정이 어떻게 되는 가 형에게 확인을 하니 우린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게됨 ㅡ.ㅡ


결국은 서울이모가 만두를 준비해 주는 바람에 늦었음

닥달해서 서울집을 나와 부여로 향함

부여 직행 버스를 타고 도착하니 어머니 친구분이 마중나와있어 함께 김응찬씨댁에 가서 아버지 신경써주셔서 감사하다고 박카스를 드리고..

그길로 부여동사무소에 가서 아버지 사망신고를 넣음

일전에 법무사에게 사망신고하고 공부정리를 하는 데 약 20일 정도 소요가 되기때문에 바로 상속포기를 못한다고 들었는 데, 동사무소에 문의하니 누가 그런소리를 하냐고 하더군

옛날엔 그랬을 지 몰라도 요즘은 초고속인터넷 시대.

사망신고하고 전산처리가 완료되는 데 40분에서 50분정도 걸린다고 함.

대강 노가리까며 기다리고 전산처리가 완료되고나서 제적등본과 망인의 주민등록등본등

사망신고가 완료되고 나서 뽑아야 되는 서류를 뽑아 그 길로 부여법원을 향함.


사실 사망신고는 어느 곳에서나 다 되는 데 이 법원이 꼭 부여법원만이 되기에 일부로 여기까지 온것임.


법원에 가서 신청서를 쓰며 보니

한정승인과 상속포기는 사건이 다르기에 아버지 서류가 한부씩 더 필요했음.

같은 사건으로 둘다 상속포기를 하거나 둘다 한정승인을 하면 서류는 한부면 되는 데,

다른 사건이니 따로 준비를 해야한다고 하네 ;;

게다가 왠지모르게 형은 서류를 다 준비 해오질 않아서 주변 동사무소까지 뛰어가게 됨


기다리는 동안 가계도를 그리며 서류를 정리하고 모아서 직원에서 확인을 받으니

옆에 있는 하나은행에 가서 각각 인지대 5000원씩과 송달료 14200원씩을 사오라네


떄마침 소나기가 와서 형이 데리러 와달라고 해서 어머니에게 돈을 드리고 형이 돌아오는 길에 사오게끔 이야기함.

 

이 금액 38400원은 내가 냈다 ㅋㅋ 잊어먹지 마셈


형이 돌아오고 바로 접수를 하고 일정이 끝남

직원이 처리하는 데 약 한두달 걸리니 알아서 연락해주삼ㅋㅋ 이라고 말하더군


흠..그렇게 일이 끝나고 사실 이때 부여집에 가서 하루밤을 자거나, 대전에 친구들을 보러가는 것 양자택일할 상황이라...친구들을 보러 가겠다고 결정함.


서대전으로 오게 되어군 ㅎㅎ


동인이 차를 타고 청주로 날라가 종호와 성헌이를 보고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짐


마지막엔 동인이가 데려다 줘서 유성 복용동에서 자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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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장티푸스로 요절하여 7살 어린나이에 다른집에 양녀로 들어가게 된 어머니.

그 나이부터 가사일을 하며 일을 하게됨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둥.


어린나이에 너무 힘이 들고 공부도 안시켜주고 그래서 가출을 감행.


그렇게 몇몇 집을 건너다니며 세번의 가출.

그리고 이름을 세번을 바꿈.


이전에는 미용실에서 일을 했다고 함.

어릴때는 자식을 머리를 다 깎아 주셨다고 하나 기억에 없음.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를 만나고..

일가 친척이 없던 어머니는 당시 시대상으로 말하자면 정말 근본없는 여자였음.

그러나 아버지는 장애인임. 장애인이 사지 멀쩡한 일반인과 결혼을 하게 된 배경은 당시 시대상이 컸음. 지금이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어머니로써는 장애인인 아버지가 자신을 잘 쓰다듬고 잘해줄꺼라 생각을 했으나 그것이 오산이었음. 아버지는 소아마비로 어릴때부터 자신의 형제 자매, 친구들에게 왕따를 다니며 자랐던 지라 성격이 엄청 삐뚤어진 사람이었음


아버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까지 입성한 두사람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림

지금이라면 장애인 치워주는 것만해도 감사할 나름인데 근본없는 여자라고 다들 반대했다네.

정말 당시 시대에 치인 불쌍한 어머니이심.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큰아버지인 형을 미워했음.

원래 부자집안이었기에 고등학교까지 충분히 보낼수 있는 집안이었음.

형이 자신을 공고인가 상고인가하는 곳으로 추천을 했다고 함.

허나 색맹이라 그쪽으론 갈수가 없는 몸이었음.

큰아버지는 그걸 알면서 추천을 했다는 것으로 당연하지만 색맹이란 이유로 떨어지게 됨. 그것이 지금까지 큰아버지를 미워하는 이유.

아버지는 중졸로 그때부터 일을 시작해서 다 할머니에게 돈을 드렸음.

그렇기에 모아둔 돈이 하나도 없었음.


그리고 결혼을 할때 할머니는 집을 해준다고 했으나...화장실도 제대로 없는 옥탑방 단칸방이었음. 게다가 집을 해준다고 하더니만 결국은 돈을 다 지불하지도 않은 방이었음.

부족한 부분은 결국 부모님이 일해서 갚았다고 함.

그러나 당시 신혼이라고 정말 즐거웠다던 어머니.

안타까운 점은 2년쯤 지나고 방을 빼야 했음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원래 집주인은 따로 있는 데 그 집에 월세를 내면서 사는 사람이 전세로 내놓은 집이었음

그집에 전세로 들어간 게 부모님.

지금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엔 있을 수 있었나봄.

그 두 집주인이 사이가 안좋아 결국 전세금도 못 돌려받고 쫒겨나게 됨.

왜 이런 집을 구해준거니 원망도 하게 되었지만

집이 없으니 어쩔수 없이 시댁에 들어가서 살게 됨.


지금껏 둘이서 신혼을 즐기다가 시댁에 들어가서 살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음

헌데 일이 좀 제대로 폈음

주변에서 두달동안 일을 해서 두달치 월급으로 서울에서 구멍가게를 시작함

똥파리만 날리던 구멍가게 였는 데 어머니가 인수하고 딱 3일지나니까 버스정거장이 들어왔음.

여기서 인생이 피었다고 함.

하루에 계란을 세판을 팔았다네. 삶은 달걀이지.

아버지가 상품을 가져오고 어머니가 파는 생활을 해서 돈 오백만을 모았음

그런 와중에 형이 생겻음

이전까지는 애를 지워왔었고...당시도 형을 지우고 싶었으나 너무 바빴음

장사가 너무 잘되서 지우러 갈 틈이 없었음

그렇게 잘되던 장사인데...

배가 불러올 쯔음 해서 할머니가 그 잘되는 구멍가게를 혜숙이 주라고 했다고 함(고모)


어머니는 어이가 없고 심통이 났지만 아버지까지 주자고 하고

형도 생겼고 너무 바빠서 쉬는 날이 없었던 나날들이라 쉬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해서 결국 고모를 주게됨.

받을 줄말 하는 집안이여..


형을 낳고 시댁의 갈굼에 하두 짜증이 났을 쯔음 해서 아버지와 함께 대전에 야반도주.

당시 짐을 대전에 있던 고모집앞에 갔다 놓고 집을 알아보고 다니심.

그렇게 대전에서의 생활이 시작됨...

내가 생겼을 때도 어머니가 너무 바빠서 사실을 지우러 가고 싶었으나 자신이 지금 일을 안하면 입에 풀칠도 못하는 형편이라 결국은 일을 하다가 애 지울 타이밍을 놓쳐 낳게 된다는...


아버지는 이때쯤 기술을 배워 시계공을 하셨다함

기술을 두개 배워서 일을 했다고는 하는 데 까먹었다네 ㅋㅋ

결국은 다 때려쳤고 ㅋㅋ


평생을 일만하고 사신 어머니. 당시엔 맞벌이가 당연한것도 아니었는데 맞벌이에 집안일까지 해내신 어머니.

그렇다고 아버지가 계속 일을 한것도 아니라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게 싫다고 때려치고 때려치고 결국 사장님소리 들어가면서 비디오집과 노래방을 했다네

그게 아버지의 전성기였지.그러나..


참 망나니같은 아버지라 어머니가 불쌍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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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아오자 너무 안잤다는 이야기를 하며 저를 재워주신 어머니.


형 친구들은 남을 친구가 3명이 확보가 되었다며 내 친구 중에 남을 사람을 알아보라 하셔 메바와 대기가 확보가 되었음

이때까지만 해도 이게 뭔소리인지 몰랐는 데..

나중에 상여를 짊어질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는 거임.

그것이 친구들.

고맘더라.


한숨자고 일어나서 입관을 하기로 했음.

또 내가 없는 사이에 있었던 일.

대전 고모가 어제 저녁에 입관을 왜 안시켰냐고 시부렁 댔다고 하심.

ㅡ.ㅡ

대체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음 왜 그걸 화내고 있는 거지

자정에 입관하라는 건 또 무슨 심보야...


어머니는 그거에 또 상처받아서 입관을 일찍 할수 있나 알아보고...

결국은 10시에 하기로 함.


입관이 뭔가 했더니 돌아가신분을 관에 넣는 거였음...말그대로 ㅋㅋ

물론 의식같은 게 있어 시체를 잘 딱어서 비싼 천으로 둘둘 싸서 넣어야함.

싸는 것도 무슨 기술이 필요한듯한 느낌이었음.


이 입관이 끝나고 아버지 친척분들이 다 돌아가심...

여기서 또 어머니가 화를 내시는 부분.

왔으면 장지까지 따라와야지 왜 입관에서 돌아가냐고..

대체 뭐하러 온거야 먹으러 온거야 뭐야.


그렇게 입관이 끝나고 화장터로 이동하여 화장함.

화장을 시작하고 바로 친구들을 배웅함.

기독교식 장례에 슬슬 짜증을 느끼던 친구들이었음


화장하는 중.

오른쪽 밑에 상자가 유골함. 아직 빈통인데 화장이 끝나면 유골함에 넣음


장남이 영정사진을 들고 차남이 유골함을 들고 친구들이 상여를 한다는 느낌이었음.



화장끝나기를 기달리며....어머니와 한컷.

잠안자고 안씻어서 머리가 떡이 지었음


엄청나게 큰 6천원짜리 육계장을 먹으며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화장이 끝나자 유골을 분쇄기에 넣어 가루로 만들어 주셨음.

가루가 된 유골은 평소 아버지가 즐겨 가시던 낚시터에 뿌려드셨음.

마지막으로 내가 건넨 이야기.


[저세상에 가셔도 낚시 잘 하세요]


그렇게 낚시를 좋아하시던 아버지. 낚시 친구들은 한명도 안왔고

친구 모임이 있다고 하더만 그 친구들도 한명 안왔던 장례식.

더욱더 초라함.


그리고 바로 서울 이모집으로 직행.

혹시라도 6시 이전에 도착하면 동사무소에서 일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6시에는 도착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 다음날로 미뤄짐.


서울 이모집에 가는 길에 치킨집이 있어 먹고 싶다는 한 마디 했다가 치킨을 시키게 됨-_-

이모는 삼겹살을 준비해놔서 그걸 먼저 배터지게 먹고 치킨은 거의 못먹게 되는 데...

난 사실 치킨이 왔을 때 바로 먹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삼겹살을 먼저 먹으라 하여 결국 치킨은 거의 못먹게 됨...

그걸 또 어머니는 치킨을 시켜놓고 내가 삼겹살을 먹고 싶어했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하는 데... 난 치킨을 먹고 싶었다니까? ;;

삼겹살 먹고 배불러서 치킨을 못먹었는 데 그걸 왜 시켰냐나니 내 탓을 하는 데...

난 삼겹살 내비두고 치킨 먹고 싶었건만 자기가 말려놓고 뭐야...이거 말이라도 이쁘게 하지

그래도 반론하나 제대로 안하고 그냥 흐지부지 넘어감.

여기까지와서 싸우면 되나 ㅋㅋ


현재 어머니 친척중에 살아계신 분은 4분

서울 큰이모.괴산이모.어머니.작은외삼촌

큰 외삼촌은 얼마전 자살을 했다고 함.


외할머니가 돌아가신건 39세때 장티푸스로 돌아가심

딱 2주뒤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심

5형제 있던게 첫째인 서울 큰이모는 이미 혼사가 있었음

큰이모는 지금까지 그걸 원망중.

썩 좋지 않은 혼사를 준비해 놨었다는 군.

그래도 지금 그 집한채 가지고 세놓고 살고 있는 데 가만히 앉아서 돈을 얼마나 벌고 있는 거니...충분하지.

나머지 형제는 뿔뿔이 흩어짐.

괴산 이모는 어릴 적부터 총명햇다함.

그래서 어릴때부터 서울이모가 괴산이모를 질투하고 혼사도 좋지 않은 곳을 준비해 놓은 부모님을 증오함.

큰 외삼촌은 그래도 장남이라고 부모님의 거의 모든것을 다 물려받았으나 결국 마지막까지 백수생활등 제대로 하는 일도 없고 있던것도 다 말어먹고 죄책감인지 먼지 자살을 하게 됨.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7살. 외삼촌은 5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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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신 시각 22시 30분 정도


일전부터 감기에 걸렸다느니 아파보인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냥 내비두시라는 판단을 하였고 그것이 결국 돌아가시는 결정적인 원인이지 않았나 생각이 듬


원인은 호흡부진 (추정)

이것으로 미루어보건데 담배를 그렇게 피워댔으니 폐에 문제가 생겨서 그런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유추해 볼수 있음


23시쯤 형이 알게됨

23시 30분정도 어머니에게 연락이 오지만 못 받음

왠지 모르지만 벨소리가 한번밖에 안울림

게다가 받을 찰라가 없음. 난 전화오는 걸 알고 받을라고 대기를 타지만 그래서 통화버튼을 누를 사이도 없이 전화가 끊김

약 열번 전화옴

평소때라면 자고 있겠지 해서 이정도에서 포기를 하거나 하는 데 계속 전화가 오는 게 이상하다 싶어....국제전화비의 압박을 느끼며 전화를 걸어보게 됨

약 0시 10분정도 - 아버지가 돌아가신것을 알게됨


급작스럽게 일단 비행기를 알아봄 

비행기를 알아보며 생각을 해보니 이제 6개월된 아들 하루는 여권이 없어서 갈수가 없음

아들이 못간다는 것은 와이프도 가기 힘들꺼란 생각을 해서 일단 어머니께 그 의향을 물어봄


만약 와이프도 꼭 오라그러면 하루를 장모님에게 맡겨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다행스럽게 오지말라고 함.

인터넷을 뒤져보니 가도 되고 안가고 되는 듯함

돌아가신분의 영이 애기한테 달라붙는다나 뭐라라-_-;;


그리고 와이프를 께워 상황 설명과 어떻게 하고 싶은 가 확인

애기는 무조건 못가니 자기도 일본에 남겠다는 의사를 확인

혼자가는 걸로 결정


비행기를 알아보니 월요일 도착하는 것밖에 없음 - 월요일은 이미 장례식끝나있음

좀더 빨리 도착하는 걸로 계속 찾아봄

비행기만 정하는 데만 5시간정도 걸림


친구에게 연락 - 경향이 없어 메바.종호.성헌.동인이에게 밖에 연락을 못함


그 와중에 비행기 결정 일요일 20시 도착

대전은 23시 도착

카톡에서 이야기한대로 종호.손군이 마중나옴

23시 10분

종호 차를 타고 장례식장에 들어감


들어가자마자 대전고모가 반겨줌-_-;;

아버지께 인사 함.

상복 (정장) 으로 옷 갈아입고 친척들에게.인사


친구들 밥을 챙겨주고 대학이 이야기를 하던 중

형에게 불려가 어머니/형과 현 상황에 대해 자세히 들음

이쯔음 초등친구가 옴. 메바 대기 준규

종성이는 메바를 통해 부조를 해줌.

나중에 전화를 하니 못가서 미안하다는 데...

난 정말 고맙더군


슬슬 늦었다고 종호손군 돌아감

내 친구또래들은 솔직히 상가집에 갈만한 나이는 아니니, 이녀석들은 부조를 안해줄지 알았는 데 부조를 해줌


종호 10만  성헌 4만 (깜짝놀라 세번 확인했다ㅋㅋ)
초등친구는 5만씩


- 부조 내역 - 어머니가 안계셨으면 답안나온다



이날 나는 메바랑 대기랑 얘기하며 밤샘


-----------------------------------------------------------------------------------------

 내가 식장에 너무 늦어온 관계로 보지 못했으나..대구 큰고모가 화내고 갔다함

영정사진이 이게 뭐냐 부터 시작해서 짜증을 부림

부조는 딸랑 십만원...


-솔직히 너무하긴 했음-



보다못한 어머니는 아버지쪽 종교인 기독교 방식으로 장례를 치룰 것으로 결심하고 학장을 부름. 기독교 학교의 학장은 사실 기독교에서는 조금 알아주나 보더군

그때부터 친척들이 기가 죽었다고 함

-이 시점에서 내가 와서, 난 일이 잘 되었다 생각만 하고 있었음-


그마나 아버지 친척중엔 제대로 주신분은 큰아버지. 부조 오십
그외 대전고모등은 와서 밥만 먹고 부조도 안하고 감

(부조를 안하신 아버지 친척이 약 9명으로 추정)

이 9명이 상가집 음식의 절반을 넘게 드셨다네


사실 아버지는 기독교를 증오하시는 분임.

어릴적부터 소아마비에 걸렸으나 당시 의학기술로 고칠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가기는 커녕, 집에서 기도를 하고 계신 할머니덕택에 평생 장애자로 살게되었으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까지 기독교로 장례를 치루시다니 솔직히 좀 불쌍하단 생각을 했지만..

이 덕분에 어머니가 빛나셨음

시댁의 갈굼에서 벗어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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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 리무진버스로 대전까지
*정부청사에서 내리는 게 좋을듯


장례 월요일


계획



철산역:철산4동 동사무소

서울가서


1.인감 등록 + 인감증명서 발급

2.가족관계증명서

3.주민등록등본


을 준비한다. [상속포기]


시간적 여유가 될때 주변 은행에서 공인인증서를 만들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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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어린이날은 일본에선 남자아이의 날이지요

실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의 의미와 같은 어린이날인데, 여자아이의 날은 3월 3일로 따로 있기에 그와 대비되어 남자아이의 날로 칭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날은 저기보이는 투구를 장식하여 남자아이의 날을 기리는 데요

개인적으론 돈지랄이라 생각하여 필요없다고 생각했고, 오랜만에 이부분은 아내님과 의견이 일치하여 와이프의 남동생꺼를 받고 이야기를 진행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동생꺼는 5단짜리 인형이라 화려하지요.

(여자아이의 날에 장식하는 아내님이 어릴때 쓰던 인형은 7단짜리...-_-)



이것이 아내님의 7단 히나인형

부모님이 부자긴 한가봐.



뭐 암튼, 동생꺼도 이정도까진 아니지만 5단짜리 인형이라 음퀘퀘하면서 기다렸더니

할머니가 나서서 손자껄 사야한다나 뭐라나-_-;;;;;


그래서 약 2만엔들여서 저걸 사왔더랍니다;;

감사히 받았지만 솔직히 음..

5단인형 기대했는데.. 하는 마음이 조금 더 크긴했답니다.


그렇게 끝나가나 싶었더니 장인어른이 나서서 인형은 할머니한테 뺏겼지만 손자에게 뭘 또 사줘야한다면서...ㄷㄷ


남자아이의 날에는 장식하는 게 또 있습니다.

코이노보리라 불리지요




대략 이런 녀석...

-_-

비싸기는 또 엄청 비싼데, 뭐 사주신다니 할말은 없지만...

필요없다고 할라고 했더니 장인어른의 반짝이는 눈을 보더니 장모님이 이건 못 막겠다고 일단 타협을 본게 애가 좀 더 크고나서...로 하기로 했답니다...



부자 처가를 잘 둔건 좋지만 참 솔직히 애매함....

저거 장식 제가 다 해야한다는 거잖슴?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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