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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창시자.

최고 권력자였던 김일성.


어릴적부터 이넘은 정말 죽일넘이라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교육을 받고 자란 나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정보의 바다에서 넘쳐흐르는 정보를 받아들이다보니, 내가 어릴적에 받은 교육들을 다 부질없는 한순간의 거짓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요즘들어 더 심하게 든다.



그 두 주인공이 바로 김일성과 김구




한국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김구.

어릴적 향간에서는 그가 피살만 안되었어도 통일이 되었을것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이제 역사를 다시 보니 보이는 것은, 그가 피살이 안되었으면 아마도 지금의 대한민국이란 없다.

사실은 기회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 이승만보다도 더한 기회주의자이지 않을까 생각도 들 정도.





김일성.



김일성은 애당초 당시부터 유명한 항일 독립운동가였다.



당시 한국에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는 이승만과 김구정도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그보다 더 유명한 김좌진 장군이나 유관순 누나나 하는 분들이 있지만, 시대가 조금 다르니 제외하자.

이승만과 김구 이외에도 김일성도 사실은 유명한 독립운동가라니!


미국에서 이승만이, 중국에서 김구가 활동을 했다면, 김일성은 소련에서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라고 한다.
그러나 광복을 맞은 한국에 들어올때는 소련군에 소속된 채 들어왔는 데, 소련의 지지를 얻기위한 방법이었다나 뭐라나..


당시 김일성은 정말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고, 어느정도 나이가 있던 남한 독립운동 투사들과 비교된다.

...그렇다는 것은 나 개인적으로 생각할때, 그만큼 사상이 진보적이었지 않을까....하는 상념에 잠긴다.



광복을 맞은 한국은 단일정부를 만드냐, 남한과 북한으로 나눠서 통치를 하느냐로 싸웠다.

그러나 당시 광복을 맞은 한국은 없었다. 패전국 한국이 있었을 뿐.

일본의 일제감점기 시대가 지나자 소련과 미국의 통치시대로 들어갈 뿐.

우리나라의 의지란 없었다. 누가 이런 나라를 광복을 했다고 하겠는 가.


소련과 미국이 자기들 마음대로 나누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으니, 누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별차이는 없을것이라는 의견이 크긴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나라에서 명망높은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연결되었다는 데...



지금이야 김일성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대표자로 보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지식층은 모두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일제강점기에 수탈을 심하게 당했던 지라 모두가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자본주의를 공부한 이승만조자 사회주의자적인 발언을 자주했다하니

당연히, 누가 대한민국을 통치하게 되든 대한민국은 공산주의국가가 되는 게 수순에 맞을 터였다.

그러나 결국 남한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탈을 쓴 채 공산주의는 박정희때까지 이어진다.

모든 것은 미국이 문제인지라...남한은 단지 이해관계에 맞는 행동을 한 것뿐.



아무튼, 미국은 남한.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고,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는 데, 두 나라의 방식이 조금 달랐다.


소련은 애시당초 만주벌판을 얻으려고 전쟁을 했던지라 대한민국에는 흥미가 없었다.

또한, 신생 공산주의 국가를 자주적으로 독립시키는 것이 국제적인 명망을 높이는 데 이득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은 해방군이 되어 나라를 독립시킬려는 생각을 가진것이 소련이다 보니 북한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국가로 성장할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대한민국사람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나라가 될 준비를 한다.



그에 비해 미국은 식민지를 원했다.

애당초 남한을 신탁통치한다는 것도 경제적 식민지를 얻기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다보니 말잘듣는 사람들을 필요로 했고, 행정적인 부분들도 해봤던 사람들이 더 잘한다고, 주요 요직들을 경험자로 채웠다.

여기서 경험자라는 것은 과거 친일파를 이야기한다.

-0-;;

우리나라에 지금 친일파 청산이 안된 이유는 정말 단순. 미국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할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그때 제대로 잘 했었야 하는 데, 우리나라는 정말 힘이 너무 없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과 소련은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각자 통치를 한다고는 했지만, 결국 문제는 우리나라안에서 일어났다.


내부의 우리가 간절히 통일을 원했으면 하나의 국가를 만들었을 테지만, 우리나라의 지도층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데, 여기에 최악의 오보사건이 터진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이라가 불리우는 데,

당시 본래의 신탁통치는 한반도의 단일정부를 만드는 데, 최대5년까지 미국,소련,중국,영국의 4개국이 신탁통치를 하되, 기본주체는 임시정부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오보를 터트린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시킬것을 주장한다]는 내용.

본래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소련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었는 데, 그조차 반대로 발표해버린것이다.




우리나라는 불과 4개월전만해도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던 나라인지라 더더욱 신탁통치에 대한 반발이 컸다.

단일정부 수립이나 임시정부수립에 대한 생각은 어딘가로 날라가고 반탁운동만이 전개되는 일이 벌어지는 데...

애당초 오보라는 것이 문제.


이럴때 오보의 장본인,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가 김구와 접촉하는 데, 김구는 반탁운동에 송진우도 참여하도록 설득하지만,

애당초 오보였으니 거절하게 되는 데, 이를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이라고 본 김구. 혹은 김구의 추종자들이 암살해버린다.

(김구야 말로 암살의 귀재다)


한편 북한에서도 신탁통치 오보사건의 소식이 전해졌는 데, 이것은 오히려 김일성의 권력을 크게 확장시켜준다.

김일성은 오보소식을 정정하여 제대로 된 사실을 알리는 바람에 미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매국노라 고무시키게 된다.

그에 비해 남한의 지도층은 오보소식을 자신의 권력 확장에 이용하여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지금 분단된 국가가 된 배경.


당시는 북한뿐 아니라 남한도 공산당이 강세였는 데, 지지도가 열세였던 김구가 오보사건을 이용하여 반탁운동을 펼치는 것으로 자신의 지지도를 올리려고 했던 것이 건널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것이다.


덕분에 이전까지는 좌우대립이 심하지 않던 나라였는 데, 오보사건을 계기로 좌우대립이 심한 나라로 성장한다.

반공과 반탁운동을 하는 사람은 애국자라고 알려지고, 수많은 친일파들은 이 시점에서 과거를 씼었다.

애국자로.


그렇다고해도 아직까지 북한과 남한은 공산당이 강세였다.

그렇기에 이승만과 김구가 힘을 합쳐 우익단체를 만들어 움직이려고 하자, 김일성도 그에 반하여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김구는 김일성의 암살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암살의 대가. 김구)



이후 소련과 미국의 협상으로 대한민국의 단일 임시정부 수립을 눈 앞에 두고도 우익의 거두인 이승만과 김구의 반대로 결국 미국과 소련도 합의점을 못찾고 결렬된다.

이승만과 김구가 반대한 이유는 단 하나.

지금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선거를 하게되면 절대적으로 불리하기에...


그만큼 공산당의 힘은 컸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결국 단일정부가 아니라 반쪽짜리 정부를 만들기로 합의본다.


남북한 선거를 하게되면 김일성이 대통령이 되고말지만, 남한만 선거를 하게되면 자신들이 대통령이 되리라는 자신이 있었던 것.


그렇게 남한의 단독정부를 세우기로 하지만, 이미 미국에게 미운털이 박힌 이승만과 김구라 섣불리 움직일수가 없었고,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려 이승만은 미국행을 택한다.


홀로 남은 김구가 이승만이 없는 틈을 타서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 기밀은 누설되고 남들의 조롱거리가 되고만다.


이때쯤에 미국의 정책도 대대적으로 바뀌었다. 애당초 시간이 걸려도 한국에 단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 데, 한반도를 공산주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빠른 시일내에 반공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이것이 이승만이 원하던 것과 일치하여 이승만의 미국행은 정말 성공적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달받지 못한 주한미군 하지장군은 그 뒤로도 이승만을 감시하고, 그뒤로 고립을 피하기위해 김구의 설득대로 우익계를 통합하기로 한다.


이때, 둘간에는 거래가 있었는 데,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반쪽정부를 만들자는 김구의 의견에 이승만은 찬성한다.

김구와 이승만의 결합이다.

김구는 이승만과 결합하고 나서 한민당도 접수하려고 한다.

자신을 중심으로 우익이 모여야 한다는 것을 피력하던 김구의 의도를 알고 있던 한민당의 장덕수는 반발을 하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된다. (암살의 귀재. 김구)


덕분에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의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까지 서게 된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승만은 거절을 하고 결국 둘은 결별하게 된다.


이때부터 김구는 반쪽짜리 정부를 만드는 방침에서 생각을 바꿔 남북협상론을 주장한다.

이것이 남북한의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것이라 김구는 후일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김구가 살아있었다면 통일정부가 수립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이 많지만, 그도 그렇지 않다는 것.



김구는 먼저 미소양군이 한반도를 떠나면 그뒤에 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주장을 관철했다.

그러나 미국은 단일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주둔군이 떠난다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야기만 하고 있을 뿐, 진전은 없었다.

결국 김구는 북한에 서신을 보내 김일설을 설득하려고 하고, 남한 선거가 있기 한달전에야 간신히 방북을 허용받는다.


그러나 북한은 구심점이 여러개인 남한과는 달리, 김일성이라는 하나의 구심점을 가지고 남한보다 훨씬 빠르게 정부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치권을 허용한 소련의 영향으로 이미 자체적인 화폐와 군대, 헌법까지 가지고 있는 상태.

정부수립공포라는 형식적인 절차만 남겨놓고 있는 상황.


결국 북한이 김구를 부른 이유는 북한 정권수립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외에는 없었다.

우리가 김구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적인 애국자로 소리높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철저히 자신이 대한민국의 탑이 되기 위해서 움직인것. 그외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김구는 선거에 불참하고, 이승만의 몰표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후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김구가 피살됨으로 대한민국도 이승만이라는 구심점 하나로 움직일수 있게된다.




김구의 존재로 인해 결국 대한민국은 우왕좌왕하게 되는 데, 지금까지 우리의 인식은 그게 아니다.

내가 학창시절에는 김구만 살아있었어도 통일 정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는 데, 그것은 박정희때 조작된 일이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깍아 내리기 위해 김구를 영웅적인 존재로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쿠테타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이기에 누구보다도 절실히 정통성을 필요로 했고, 그러기 위해서 이승만을 깍아내리고 김구의 존재를 부각시킨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배경이라고 한다.




해방후 1970년대까지는 남한보다 북한이 훨씬 잘 살았다.

북한은 김일성을 구심점으로 자치권을 가지고 친일파를 처단하고 토지개혁을 이룬다.

북한에서는 국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을 나눠어주고 있다는 소문이 남한까지 퍼져 결국 지식층은 대부분 북한으로 가버리는 사태.

남한에는 그에 반발한 북한의 지주나 부유층이 모였다.


북한이 훨씬 잘 살았던 이유는 해방후 지하자원과 공장들이 대부분 북한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에는 논과 밭밖에 없었을 정도.

그러한 상황이니 남한은 개차반이고 북한은 엄청나게 잘 살은 것은 당연한 일.

거기다 북한은 남한 인구의 절반도 안됬다.

남한은 한정된 자원으로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당시로 따지자면 농촌.

북한은 잉여자원도 많은 데, 핵가족인 도시였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좌익이 뭉친탓에 텃세를 느낀 우익들은 모두 남한으로 넘어왔다는 것도 한 몫했으리라.

남한이 좌우대립으로 우왕자왕할때,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데 뭉쳐 대대적인 개혁을 한다.

노동법을 실시하여 하루에 8시간만 일한다는 내용등, 당시로는 정말 획기적이었다.

개혁은 친일파의 토지는 모두 몰수. 지주들은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면 모두 몰수. 자신이 농사를 지어도 극히 제한된 토지이외에는 전부 몰수한다. 그렇게 몰수한 토지는 노동이 가능한 사람수에 따라 공짜로 분배해 버린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당시의 북한은 사유재산이 인정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 결국 모두 국유화해버린다)


그와는 비교되게 남한은 친일파의 청산도 안되었고, 추가로 자본주의를 표방하면서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고 모두 미국이 관리하여 토지를 빌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6.25는 남침이냐 북침이냐 말들이 많지만, 정부수립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할때까지 남한과 북한은 누가 먼저라고 할것까지 없이 전쟁을 통해 통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두 정부는 서로 자신이 정통성이 있는 정부이며, 서로 다른정부는 정부가 아니라 외면하고 있던 때였다.


정부가 수립되자 원래 약속되로 소련군이 먼저 철수하고, 미국군도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미국이 철수하면 상대적으로 엄청한 열세였던 남한은 북한에게 공격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승만은 남한 내부로의 단결을 꾀했다.


그것이 더더욱 문제였던 것이...


지금 연평도니 하는 것처럼 북한이 가끔 남한을 공격하는 것과 똑같았다.

38도선 주변에 국지적인 도발을 행한 것.

지금 한국이 공격당하면서도 북한에게 큰소리못하는 이유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북한이라는 주적을 토대로 남한의 하나로 뭉치게하려한다.

이때문에 외교의 귀재라고 칭송받던 이승만은 결국 전쟁도발자라는 이미지가 찍히게 된다.

향간에서는 이승만이 나이를 너무 먹어 판단력에 장애가 생겼었다고 말할 정도...


사실 북한은 이승만의 도발이 있기전에는 남한 내부로서의 붕괴를 꾀하고 있었다. 현상황에서도 알아서 민중봉기 해주겠지 하는 마음.

그러나 이승만의 도발이 거세지자, 통일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게 된다.


그러나 김일성이 착각을 하고 있던 점은, 남한 내부로써의 붕괴를 꾀하며 빨치산을 파견한 것부터 시작이다.

이승만은 빨치산을 파악하고 그들을 소탕하는 데, 남한 내부에 있던 좌익들을 전부 소탕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김일성이 남한을 침략하면 민중들이 알아서 봉기해 주겠지 하고 한국전쟁을 벌였지만, 이미 김일성 추종자들은 전부 소탕된 바람에 민중은 봉기하지 않았다.


남한에게 도발당해 이를 갈고 있던 김일성이었지만, 쉽사리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이, 미군의 존재였다.

그러나 국제적인 정세는 북한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군의 철수에 이어 소련의 핵실험 성공.

중국의 공산당 통일

중국의 공산당 통일에 의해 미국의 아시아권에 소극적인 자세로 바뀐다.

그리고 결정타. 애치슨 선언.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반드시 지키겠다는 라인에서 남한은 철저히 배제된다.


그 원인은 이승만에게 있었다.

평소 북한에 도발을 하던 것을 알고 있던 미국은 그것을 저지하고자 일부로 빠뜨렸다는 것이다.

애치슨 선언과는 별개로 남한은 지켜줄 속셈으로 있었던 미국이었지만, 김일성은 그런 사정까지는 알 수가 없고, 애치슨 선언만을 보고 사기가 상승했던 것은 틀림없다.


1950년2월에는 중국과 소련이 우호동맹을 체결하자, 김일성은 이제 중국과 소련에게 남한을 침략한다는 허가를 받는 일만이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소련의 스탈린에게 연막작전을 펼치라는 조언을 받은 김일성은 그 가르침대로 평화적으로 통일을 할것처럼 대화를 시도하면서 기습공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6월7일. 김일성은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평화통일을 하자고 주장한다.

원래 김일성이 생각하고 있던 침략예정일은 8월15일로, 일제로부터의 광복절이다.

남한을 해방시키겠다는 야심찬 날짜였다.

그러나 6월 25일 남한의 군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기습공격을 강행.


한국전쟁의 발발이다.



애시당초 6.25를 북한이 침략했다고 북한 나쁜놈! 이라고만 외치는 것은 역사의 왜곡이 아닐까 싶다.

만약 남한에도 북한과 같은 상황으로 군사력이 2배정도 되었다면 북한을 침략했을 터이다.

6.25의 발발원인조차 이승만에게도 있으니, 남한이 가만히 있는 데 침략해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의 정의는 김일성에게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더이상 통일을 바라보기는 힘들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통일정부를 지향하던 당시 국민들도 남한 단일정부를 지향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정통성이 부족했던 이승만의 입지가 확고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 후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김일성도 비슷한 이유로 정통성을 찾고 유일체제의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전쟁책임을 빌미로 당시 눈엣가시였던 존재들을 모두 소탕한다.

북한 역시 전쟁후 소련과 중국에게 막대한 원조를 받는다.


중국은 우리에게 있어선 고래부터 있었던 나라같은 느낌이지만 당시 중국은 이제 막 창건한 신생국가였다.

국민은 많았지만 경제,군사 모두 처참했다. 소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공산주의 국가인 만큼 반미감정이 쩔었는 데,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

전후, 전쟁 참전을 빌미로 소련의 도움을 자연스럽게 받는다.



일본은 정말 한국에게 수백번 감사를 해도 모자랄 정도로 특혜를 받았다.

미국은 대부분의 전쟁물자를 일본에서 조달을 했고, 그것은 곧 경제적인 부흥으로 이루어졌다.

흔히들 알다시피 세계경제대국이라는 일본은 당시 전후 빈곤국중 하나였다.

전쟁에게 패하고 전 세계에 있던 일본 국민이 돈 한푼없이 입국한다.

전쟁보상금으로 엄청나게 털린 일본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지였다.

그런데 일본인이라고 입국해 오는 자들 또한 거지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전쟁에 물자를 팔아먹으니 이것이 바로 한국전쟁 특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적자였던 국제수지는 흑자로 전환된다.

뿐만 아니라 무기를 일본에서 조달했던 미국은 전문 기술자를 파견하여 일본에 생산노하우를 지도하기까지 한다.

일본에게 있어선 절호의 기회였다.




남한은 빨리빨리문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느릿느릿문화가 기본적인 한국인의 삶이었는 데, 조선선비,양반들을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전쟁을 통해 대충대충,빨리빨리 피난을 가야 산다는 관념이 지배적이 되었다.




여차저차 휴전을 하고 남한도 북한도 초토화 되었다.

그렇지만 북한은 쭈욱 잘았고, 남한은 쭈욱 못 살았다.

전후 북한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복구를 우선시한다. 이것을 박정희가 뒤늦게 따라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북한의 집단농장체제의 변환.

전쟁은 북한에게 있어서도 절호의 기회였다.

사유재산을 허용하던 북한은 복구를 위해 모든것을 국유화하고 궁핍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주장했다.

전쟁으로 인해 모두가 가난하게 된 국민들도 한마음이 되어 일을 했기에 효과는 극대화되었다.

북한이 잘살게 된 원동력이다.


남한은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키고 제일 먼저 한일은 쌀가게를 털어서 강제로 쌀을 몰수하여 서민들에게 나눠준 일이라고 하니, 얼마나 궁핍하게 살았는 지 상상이 간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남한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공산주의였다. 공산주의를 택한 북한이 저렇게 잘 살다, 우리도 따라하자는 것이다.



남북한의 처지가 바뀌게 된 것이 1970년대.


사실 그렇기때문에 이전까지 일본에 있던 재일교포들은 모두 북한에 살고 싶어 했다.

덕분에 일본의 남아있던 한국인은 아직까지 북한을 국적을 택할 정도 였다.



1970년대까지 김일성은 단 하나를 목표로 삼아왔는 데, 바로 모두가 쌀밥을 먹는 풍족한 사회였다.

그리고 가능하리가 생각되었던 그것이 불가능해진것이 소련의 원조가 끊긴것이다.

소련군의 철수.


아직까지 미군이 주둔하던 남한과 달리, 이후 북한은 군비에 엄청나게 돈을 투자해야 했다.

남한은 군비에 돈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차이가 발생한다.


결국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김일성은 우상화 작업까지 실시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지도자 수령 김일성의 이미지는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다같이 잘 살자고 일어섰는 데, 이때부터 대부분의 돈은 군비로 흘러들어가고 결국 서민들의 삶은 여기에서 멈춰버렸다.

열심히 일해서 다 같이 잘 살때 공산주의는 정말 힘이 되는 것같은 것이, 다들 힘냈다는 소문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도 다 같이 못 살때, 공산주의는 결국 파멸하게 되는 것. 다 같이 일을 안하는 것이다.

1970년전 김일성의 활약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지만, 무너지기 시작한 나라의 김일성은 최악의 지도자였지 않을까 싶다.


북한은 결국 소련의 해체 더불어 고난의 행군에 들어서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구심점을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정일파와 김일성추종자들의 파로 둘로 나누어져 마치 광복후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내부에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학창시절 학교에서 배우던 내용과는 정말 상이한 부분들도 많고, 알려주지 않는 내용도 많지만, 그것이 어쩔수 없는 것이, 대부분 1995년이후 비밀문서들이 세간에 개방되면서 알려진 내용이니, 내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지 모르겠다.



남한은 1970년대 이후 운에 운을 거듭하고 일본에게 전쟁보상금을 받아 위안부와 피해자, 독립운동가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고 나라경제를 발전시켰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진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지금까지 까이고 있는 내용이지만, 우리가 지금 북한보다 잘 살고 있는 것은 그래도 전쟁때 피해를 보신 분들 덕택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안타까운점은, 잘살던 북한이 못 살게 된 계기는 애당초 군비의 지출에 있다. 만약 통일이 되면 다 같이 못산다고 반대하는 분들이 많지만, 난 그렇게 생각안한다.

1970년까지만 해도 잘 살던 남한보다 북한이었다. 그말은, 통일이 되어 군비의 지출이 없어지면 북한도 예전의 위상을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통일이 되면 잘 살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한때 잘 살었던 만큼, 기반만 마련되면 북한 국민들도 다시 일어설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향간에는 북한이 먼저 최소 GDP 1만불은 달성해줘야 통일을 할때 타격이 줄것이라는 것을 보면서, 과연 지금의 고립된 북한이 제대로 일어설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물론 그렇다면 통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또한 만약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일본에게 전쟁보상금을 다시 한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통일축하금]이라는 명목이 될지도 모르지만.

남한은 이미 박정희가 싸바싸바해서 돈을 받아먹었다지만, 북한은 받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북한의 분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물론 당시 고생했던 분들,혹은 그 후손들에게 재분배해야할 금액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옛날 박정희가 그렇던 것 처럼 지금의 우리도 분배보다는 북한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대한민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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