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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한국경제


● 신자유주의 경제 사상


1970년대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커다란 시련을 맛보게 된다.


중동에서 전쟁이 터지자



 

아랍의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을 편드는 서방국가에 대한 시위로


석유를 팔지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국제 유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자 세계 각국에서는

석유값과 전기값이 올랐고






수익성 악화로 

공장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게 되었고


공장이 문을 닫자 거리는 

직장을 잃은 실업자로 넘쳐나게 됐다.





그렇게 슬럼프에 빠진

세계의 경제는


좀처럼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 당시에는 물가가 뛰어오를 것이라는 예상에 '사재기'가 만연했다.


그런데 석유 값이 올라

물가가 상승했는데도 불구하고


실업율이 높다는 것은 

당시의 고정관념으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케인즈가 분명히 그랬잖아.


경제가 불황이면 

돈을 찍어서 부양시키고


경제가 호황이면 

돈을 거둬들여 과열된 걸 식히라고."





케인즈의 이론은 

1930년대 미국의 경제대공황을 처방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면서


1970년대까지 세계 각국에서는

경제정책의 바이블로 맹신하던 이론이었다.






"분명히 그랬지.

그런데 요즘은 물가도 높고

실업률도 높잖아."




"케인즈 이론은 순 엉터리였어.

이럴 때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하잖아."




▲ 스태그플레이션 : 경기는 불황인데도 물가는 높았던 상황


결국 이런 불신감이 팽배했고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나왔다.



 


 시카고대 교수1

"인위적인 경제정책으로는 

단기적인 효과 밖에 얻지 못함.


경제개발계획이니 사회복지니 하는 것은

공산국가처럼 비효율성만 초래할 뿐임." 



 시카고대 교수2

"맞아. 정부가 나대면 

결국엔 경제가 망함.


요즘 경제가 침체한 것은

각종 규제로 기업을 옭아매려는 정부의 정책 때문임."





그리고 이런 경제 사상은 

크게 득세하여


미국과 영국에서는

레이건 행정부나 대처 정권과 같은 

신보수주의(신 자유주의) 정권이 집권하기에 이른다.

 


 레이건

"앞으로 세금 줄이고, 각종 규제 줄이고, 

노조도 약화시켜줄테니

기업들은 맘놓고 장사하라능."


레이건

"국가 세금을 좀 먹는

방만한 국영기업들은 

모두 민영화를 시켜서 효율성을 높이겠음."



 대처 수상

"경제 개입을 최소화하고

치안과 질서에만 힘쓰는

작고 강한 정부를 만들겠음."


이른바 탈규제화, 

민영화 정책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전세계 자본주의의 리더

미국이 실시하자



▲ 레이거노믹스


곧 모든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 사상'은

급속도록 확산되게 되었다.



● 개방화의 요구


신자유주의 사상이

선진국을 중심으로 히트를 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70년대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성장하면서 

나름 매혹적인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더 이상 아시아는 가난하지 않아.

인구도 많고, 높은 경제성장으로 

구매력도 왕성함."




"그런데 물건을 

당최 팔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맞아. 자국의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어찌나 관세를 매겨대는지."


이렇게 서방의 기업들은

개발도상국의 시장을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선진국들은 

이미 포화가 된 자국의 시장에서는 

만족할만한 투자기회를 찾기가 어려웠다.


바로 이럴 때 미국을 필두로

'신자유주의' 사상이 대두된 것이었다.


"모든 규제를 철폐하겠어. 관세도 철폐하겠어.

국제 무역도 철저히 시장경제 논리로 임하겠다능."



"어? 그럼 우리 물건 

앞으로 관세 안 매기는 거임?"


"그럼, 그렇고 말고."


"어??"


"대신 너희도 관세 철폐해."


결국 이런 의도였다.


"우리가 자유무역 하겠다는데

너희는 왜 치사하게 굴어?"


결국 미국을 필두로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선진국들은 호황기에 있어서


개도국과의 무역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사정을 봐주고 특혜를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선진국들의 경제가 침체되고


일부 개도국들은 세계 시장에서 

어느덧 경쟁의 상대로까지 성장하게 되자


더 이상 선진국들은 개도국에게 

너그러운 아량을 베푸려 하지 않았다.



"내 코가 석자야!"


결국 이러한 선진국들의 입장 변화가

전세계 국가들에게 

개방화를 강요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선진국들은 

1986년에 우루과이 라운드(UR)를 통해


장차 WTO라는 기구를 만드는데 

포석을 깔게 된다.


 

"WTO는 구체적으로 뭥미?"


"개방화 정책에 반대하면

강제적으로 제제를 가하겠다는


선진국들을 위한 맞춤 기구."


 

"아!"



● 경제자유화 요구


그런데 딱 이런 시점에 


우리나라에서도 내부적으로 

자율화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게 된다.


▲ 부마항쟁 (1979년)


특히 정부주도형 경제체제에 대해

기업들은 불만이 많았다.


물론 60~70년대에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하게 하는데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도한 국가 개입 때문에


민간 부분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억제되고 있다는 비판이 많았던 터였다.


"60~70년대 고도성장을 했던 개도국들은

대부분 정부주도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지."


 

"어, 그랬어?"


"하지만 정부주도형 성장이라는 것은

경제가 미숙한 상태에서나 효과적이었지


경제가 양적으로 성장된 상황에서

무리가 있고, 한계가 따랐어."


 

"아!"


"우리나라는 70년대 후반부터

그런 조짐이 점차 나타났고.."


"80년대로 가면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이미 세계 20위권 정도로 커지기 때문에


더 이상 정부가 나서서

감놔라 대추놔라 하기가 어렵게 됐지."



▲ 1980년대 초반 서울


때문에 기업들은 

경제적으로 자유를 요구하게 됐고

 

일반 시민들도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 518 민주화운동


여기에 미국도 압박하고 있었다.


결국 새 정권은 대내외적으로 

다각적인 자유화와 개방화 조치들을 행해야만 했다.


 전두환

"앞으로 통금해제!

밤 12시 넘어서 돌아다녀도 잡아가지 않겠삼."



 전두환

"학생들은 두발자유화, 교복자율화 실시!



펑키머리를 하든 

빤짝이 옷을 입든 상관 않겠삼" 



 전두환

"해외여행도 자유!"



한편 기업 활동에 대한 

국가 개입의 배제라는 측면에서 


자율화는 공기업의 

'민영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두환

"시중 은행들 앞으로 민영화!

니들 꿔주고 싶은대로 꿔줘도 됨."


당시까지 은행들은 모두 정부 정책을 위한

자금 창구와도 같았는데


1981년 이후로 민영화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 한일, 서울신탁, 제일, 조흥은행 등이 민영화되었다.

 

그 밖에도 이런 사업들을 민영화했다.

 

 전두환

"대한석유공사 민영화!"


 전두환

"포항제철, 한국전력은 

단계적으로 민영화 시켜줄거라능."



그리하여 포항제철은 

2000년 경에 완전히 민영화된다.



● 삼저 호황


195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은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 1960년대 초반 일본의 주요 수출품 : TV, 라디오, 전화기


1980년대 초가 되면 (1인당 소득에 있어)

미국과 경제적으로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서게 된다. ☞ 참고


당시 일본의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것은 수출로서,


▲ 80년대 일본의 자동차


일본은 경제성장을 유지하기위해 

환율을 고정시키며 무역흑자를 이어가고 있었다.

 

때문에 미국은 불만이 많았다.


"아놔, 일본 물건들은 값이 싸서

도저히 미국의 물건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능."


"맞아. 지금 미국의 제조업은 

파탄 일보직전임.


게다가 무역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고.."


 

결국 미국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앞으로 일본 엔화가치 팍팍 올리라능."


결국 1985년 플라자 합의를 기점으로

엔화 가치는 1년 사이에 

거의 두배 가까이 뛰어오르게 된다.


▲ 엔/달러 환율 추이


그랬더니 느닷없이 

반사이익을 받은 나라가 있었다.


누규?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우리나라는 비록 후발주자이긴 했지만


전자제품 분야에 있어 

당시 일본과는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수출이 크게 주춤하자

우리나라의 수출은 크게 탄력을 받게됐지."



 

"아!"


여기에 미국은 자국의 달러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달러화를 대량 찍어냈기 때문에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지자

달러화의 이자율 역시 낮아졌다.


▲ 미국의 80년대 이자율

 

 

"왜 돈을 찍으면 이자율이 낮아져?"


"시중에 돈이 많아지면 

그만큼 돈을 꿔주려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꿔가려는 사람들은 줄어드니깐."


 

"아!"


그렇다면 함 보자.


엔화가치는 높아지고 달러가치가 낮아졌다.



달러가치가 낮아진만큼 국제 석유가격도 낮아졌다.

 

달러의 이자율도 낮아졌다.


이렇게 3가지가 낮아지게 되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80년대의 '3저(低)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이익을 봤을까?


엔화가치는 높아지고 달러가치가 낮아졌다.


일본 제품의 수출이 줄어들자, 한국 수출은 반사이익

 


달러가치가 낮아진만큼 국제 원자재 가격이 낮아졌다.


 석유 등의 원자재를 싸게 사올 수 있게됨.



달러의 이자율도 낮아졌다.


 싼 이자로 외국에서 돈을 꿔올 수 있게됨.


 

결국 ~번의 효과들로

우리나라는 유례없던 특수를 누리게 되었고


한국은 이 시기 수출 증대로 인해 


건국 이래 최초로 

경상수지 흑자를 달성하기도 한다.


▲ 우리나라의 80년대 경상수지 상태


바로 이 시기(1980년대 후반)를 두고

흔히 '삼저 호황시대'라고 한다.


 

"아! 운 좋은 전두환."



● 구조조정 노력과 한계점


70년대 정부 주도형 성장정책은

고도성장을 주도해 왔지만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고 있었다.


 

"어떤 사회적 비용이 있었는데?"


"정부↔대기업 간의 긴밀한 유착으로

정치인들은 부패했고

대기업들은 쉽게 독과점으로 변했지."


 

"독과점이 되면 어떤게 나쁜데?"


"독과점이 되면 

시장에 경쟁자들이 사라지게 됨."


 

"그래서?"


"기업은 품질개발에 소홀히 하게되고

가격을 높게 책정해서

소비자들에게 부담을 씌우려 들지."


 

"아!"


"또 정부 주도형 성장정책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중소기업이 위축되고


은행은 정부의 입김대로

꿔주고 싶은 기업한테만 

특혜를 베풀게 되는 문제점도 나타나지."


▲ 정부주도형 계획경제


때문에 8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하나 둘씩 인식하게 되고


경제를 구조 조정하고자

여러가지 특단의 조치를 단행하게 된다.


"기업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개방화에 요구에 맞춰

외국인들에게 국내 산업의 문호를 개방한 것도

 

모두 다 이런 이유에서였지"



▲ 개방화의 상징, 88 서울 올림픽


하지만 구조조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전히 국가의 입김이 주효했으니..

이런 일도 있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 국제그룹은


재계순위 6위에 등극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재벌이었다.



하지만 국제그룹의 회장은

평소 전두환 정권에게 

뇌물을 바치는데 소홀히 하고 있었다.


이럴 때 어느날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재벌 총수들을 불러모아 놓고 

만찬회를 하고 있었다.


 전두환

"이번에 내가 

재단(일해재단)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하는데

각자 얼마씩 내줄 수 있삼?"


 삼성그룹

"저는 15억 내겠습니다."

(당시 15억이면 오늘날 200억에 가까운 금액이다.)


 현대그룹

"각하, 저도 15억."


 럭키금성그룹

"저는 12억 내겠습니다."


 국제그룹

"저는 5억.."


 전두환

"뭐? 5억??"


이말에 전두환은 빈정이 상했다.


예전에도 3억만(?) 바쳤다고 

대놓고 면박을 주기도 했었던 터였다.

 

이후 국제그룹은 어떻게 됐을까?

 

 

기업들은 사업을 하다보면

필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정치권의 지시로 국제그룹은 


이후 시중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려올 수 없게 된다.


 

"헐! 말도 안돼."


그리고 얼마 후 

국제그룹은 부도 처리되어 공중분해 되고 


그룹은 다른 기업들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된다. 


▲ 당시 보도 자막


만화같은 얘기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즉 구조조정을 외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경제 개혁(?)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개방화에 대한 대응도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했으니..


여전히 기술집약적인 부품 소재들은

외국(특히 일본)에서 수입해 오면서



우리나라는 가공조립을 통해 

완성품을 만들고


그걸 싼 값에 외국으로 팔아넘기는 식으로

가격 경쟁에만 치우치고 있었다.



"품질 개발이 안되니

가격을 낮추는 것으로 경쟁력을 삼았던 것이지."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수출을 많이 해봤자 

이윤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맞아. 이런 이유로

3저 호황이 끝나는, 1990년 부터는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무역 적자국으로 

다시 돌아서게 되지."




1990년대의 한국경제


● 위기의 90년대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경제는 

겉으로는 매우 좋아 보였다.


경제규모는 세계 11위였고

한국 밑으로는 인도, 러시아, 멕시코, 호주 등이 있었다. 

▲ 우리나라는 1994년부터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까지 줄곧 GDP 세계 11위를 유지했었다.

 

 

1995년에는 1인당 소득이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서기도 했으며 ☞참고



대한민국은 자칭 선진국이 됐다며

샴페인을 미리 터트렸고



그 기세로 일명 경제선진국가 단체인 

OECD에 가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여전히 경제는 매년 7~9%의 

고도성장을 구가 중이었고


▲외환위기 이전의 90년대 경제성장율


실업률은 낮고

물가수준도 양호했다.


당시 외국의 한 경제 분석가는

곧 한국이 G7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었다.

 

다만 이런 와중에도

불안의 조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경상수지가 만년 적자였다.



무역 적자를 줄이고

균형수지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원화가치를 떨어뜨려서

기업들의 수출을 도모해야 했지만


▲ 원화가치를 떨어뜨려서 지렛대의 추를 조정해야만 했었다.


정부는 국민소득 1만불이라는 

상징성을 위해서라도

한사코 인위적으로 환율을 유지하려 들었다.


 김영삼

"1만불 사수해.

정권의 체면이 있지!"


또 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은 

여전히 그칠 줄 몰랐고

 

호황기를 틈 타 저마다 

무리한 사업 투자를 하고 있었다.

 

 대우그룹 회장

"대마불사라고 했잖아.

몸집을 불리면 언젠가는 그게 다 돈이야."


그러던 중 1996년.


몇년째 안좋던 경상수지가

최악의 상황까지 빠지게 된다.


경상수지 적자의 수준은

무려 GDP 대비 4%를 넘어서게 되었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것은


기업들의 수익성이 상당히 나빠졌다는 

방증이기도 했지."


그러더니 1997년 새해 벽두부터

대기업들의 잇딴 부도 소식이 들려왔다.


한보가 무너지더니



삼미가 무너지고



진로가 무너졌다.



한편 당시 은행들은 

금리가 싼 선진국에서 단기로 돈을 빌려서


금리가 높은 동남아에 

장기로 투자를 하는 식으로 


이른바 '돈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남아 경제가 심상치 않았다.


90년대 들어 꾸준히 호황을 누리던 

동남아 경제가 몇년째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연이어 화폐가치가 폭락했다.





"경상수지 적자가 계속되면

왜 화폐가치가 떨어짐?"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하잖아.


그런데 적자가 계속되면 

나라의 금고에서 달러가 자꾸 빠져나가게 되지."


"그런데?"


"공급이 줄어들면 가격이 오르잖아.


달러 역시 부족해지는 만큼

달러의 가치가 오르게 되는 거임."

(=자국의 화폐가치가 떨어지는거임)


"아!"


여튼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터진 위기는

동남아 전역으로 확산됐다.


"원래 증권 투자라는 것은 

소문에 민감하거든."


"그래서?"


"어떤 국가에서 부도소식이 들리면

대부분 이웃나라까지 덩달아 피해를 입게됨."


"왜?"


"투자자들 심리가 그러함.


혹시 위기가 번질까 싶어

투자자들은 미리 자금을 빼내는 거지."

 

때문에 동남아발 금융위기는

당시 동아시아의 나라들을 


모두 한번씩 

건드려보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고)



그러다가 버티면 괜찮았지만

쓰러지면 도리가 없었다.



● IMF 구제 금융


태국 : KO



인도네시아 : KO



말레이시아 : KO

 

필리핀 : KO



홍콩 : 버텨냄



대만 : 버텨냄



그리고 다음 타자는 한국이었다.


외국인들은 갑작스레 

한국의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기아가 무너졌다.

기아는 한국에서 8번째 대기업이었다.



주식과 더불어 채권도 회수해갔다.


외국은행들은 만기가 돌아온 

한국의 채권에 대해 기존 관행과는 달리 


만기 연장을 거부했고 

빚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은행은 달러로 빚을 갚아야 했다.

때문에 달러가 빠져나갔고 환율이 급등했다.

 

결국 부족한 달러는 

정부의 외환 보유고에서 풀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부라고 달러가 많았겠는가?



장기적인 수출부진으로 

외환 보유고도 충분치 않은 상황이라


정부에서 달러를 풀어도 

금방 사라졌다.


때문에 원화가치는 속절없이 떨어지고

달러를 구하지 못한 기업들은 하나둘씩 쓰러졌다.


▲ 당시 환율은 2천원까지 뛰어올랐다.


급기야 외환 보유고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의 달러 보유고는 

총 39억 달러에 불과했다.


39억 달러란 

사실 어처구니 없는 수치다.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석유도 사고 원자재도 사야하는데



한달 수입액으로만

당시에는 120억 달러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외환 창고에는 

39억의 달러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우리나라는 미국에 지원요청을 했다.


 임창열 경제부총리

"도와주삼."


하지만 미국은 한사코 거부했다.


"직접적으로 꿔줄 수는 없음.

IMF를 통해서 지원받으라능."

 

당시 미국은 한국의 사태를

수개월 전부터 감지하고


이참에 한국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서

시장을 전면 개방시키려 하고 있었다.



때문에 한국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일본과 중국의 행동도 막고 있었다.



"어찌보면 IMF는 국제 기구라는 탈을 쓴

미국의 이익단체와도 같았음."


 

"읭?"


"IMF의 최대주주가 미국이거든."




"지금도 미국은 유일하게 

IMF 내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지."



● '외환위기'의 급한 불 끄기


결국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됐다.


 경제부총리

"돈 좀 꿔주삼."


 캉드쉬 IMF 총재

"대신 몇가지 약속을 해주삼."


 IMF 총재 

"지금 한국 금융기관들 너무 폐쇄적임.

외국인한테도 거래의 자유를 팍팍 줬으면 함."


 경제부총리

"그러죠."


하지만 이런 국가적 약속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한국경제의 중요한 결정은 

모두 IMF에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제신탁통치'라고까지 했다.


 

다만 이렇게라도 했기에

겨우 50억 달러를 빌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수십억 달러의 돈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만기가 도래한 외채는 

연장되지 않고 계속 빠져나갔던 것이다.


 

"돈을 꿔오면 뭐해.

갚는 돈이 더 큰데.."


설상가상으로 세계은행도 한국에 돈을 꿔주는데

높은 이자율을 매기고 있었다.


 경제부총리

"이자 좀 내려주삼.

이건 너무 불공정함"


하지만 거부당했다.


외국인들은 과연 한국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할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궁지에 몰린 한국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새 대통령이 나서서 외국인들을 안심시켰고


 김대중

"IMF 합의 내용 철저히 이행하겠뜸."


국민들은 자청해서

금모으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전국민이 장롱 속 금붙이들 수출하면

수백억 달러를 모을 수가 있음."


사실 이런 모습은 

외국인들에게는 충격에 가까웠다.



그동안 IMF가 구제금융을 지원해줄 때


국민들이 나라를 살리겠다며 

집단적으로 행동을 취한 사례는

그 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한 유명 은행가는

당시 금모으기 운동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윌리엄로즈 시티은행 시장

"당사자들이 저렇게도 

절박하게 매달리는데


국제 사회의 지지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눈물 겨운 노력 덕분일까?



한국은 채권 만기 연장에 성공하게 된다.


"사실 외환위기의 탈출은 

IMF의 구제금융보다 


미국은행들의 채권 만기 연장이 

훨씬 도움이 컸음."


 

"아!"


다만 조건이 있었다.


"채권 만기 연장해줄게."


 

"오! 땡큐!"


"대신 조건이 있음.

구조조정 좀 하라능."


"한국 기업들 너무 방만하고

한국 노동자들 너무 철밥통임.


이래 가지고는 외국인들은 한국 시장에

투자하려고 들지 않는다능."


 

"옛썰!"


그렇게 미국은행이 만기를 연장해주자

세계 각국의 은행들도 동참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외환위기의 급한 불을 끄게 됐다.



● 뼈를 깎는 구조조정


하지만 이때까지 국민들은

IMF 구제금융의 고통을 제대로 몰랐다.


그저 나라 경제가 휘청거린다니

금모으기 운동을 통해

달러를 마련하고자 했을 뿐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고통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미국에게 구조조정이란 약속을 했다.


그리고 당장 실천을 통해

보여줘야만 했다.


 김대중

"방만한 기업들 거품 빼자능.


대기업들은 현재 400%가 넘는 ☞부채비율을 

사재를 털어서라도 200% 수준으로 낮춰!"


"헉!"


 김대중

"그리고 중복 사업들은 

모두 한 기업으로 몰아주기 하자능.

빅딜 실시!"


이러다보니 대기업도 망하는 세상이 됐다.


은행은 불안한 기업에게는 

돈을 꿔주지 않았고



높은 이자와 자금난으로

IMF 사태 이후 1년동안 


무려 2만개 이상의 

중소기업들이 쓰러졌다.


여기에 가계 살림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노동시장의 유연화, 즉 정리해고제였다.


 김대중

"정리해고제 실시!"




그러자 많은 국민들이 충격에 빠졌다.


가장은 일자를 잃고,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들은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경기 침체로 자영업자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편 금융시장의 전면 개방으로

우리나라는 장차 


외국자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을 해야만 했다.


사실 금융시장의 개방이야말로

미국이 바라던 바였다.


그동안 미국의 투자자들은

한국 시장을 놓고, 이렇게 불평하고 있었다.


"한국 경제는 너무 정부주도적이고

민족주의적이고 폐쇄적임."


때문에 IMF의 처방을 통해서라도

한국 시장을 개방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미국에서는 한국에서 

부정적인 여론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최근 원화가치 폭락으로 

한국의 주가는 매우 저렴하게 됐는데


이럴때 외국인들이 기업사냥에 나서면

한국 사람들은 

IMF에 농락 당했다는 느낌을 받게될 것임."




하지만 우려한 상황은 일어났다.


자본 시장의 전면 개방에 따라

주요 금융기관은 잇따라 외국인 소유로 변했다.



은행들의 외국인 지분율 비중은 

20% 선에서 50% 이상으로 증폭됐다.

 

경영권까지는 아니지만 

사실상 외국인 지배구조의 은행이 된 것이었다.


 

주식시장에서도 

외국인들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었다.


90년대 말 외국인 지분율을 평균 15%였는데

IMF 협정 이후 30% 가까이로 늘어났다.


"말이 30%이지.


주식처분이 어려운 

기업소유의 지분을 제외하면


외국인들이 기업의 주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임."


 

"아!"


결국 외국인 지분의 상승은 

'자금 확보'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그만큼 외부 충격에 

취약한 구조를 만들게 되었다.




● IMF 구제금융 이후의 한국경제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달러 확보'를 위해서라도


수출에 주력해야만 했다.


▲ 외환보유액은 해마다 늘어나, 현재는 세계 6위 수준이다.


때문에 원화가치를 낮춰서

환율을 높이는 정책을 

최근까지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이렇다 보니

대외의존도가 상당히 커지게 됐다.


▲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수출 6위다 ☞ 참고


90년대말 GDP대비 수출비중은 30%정도였지만

최근에는 50%까지 치솟았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생산물 중

절반 정도를 해외로 팔아먹고 있다는 뜻임."


 

"그럼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면

우리나라도 덩달아 요동치겠는걸."


"당연하지. 중국과 미국이 기침만 해도 

한국 경제는 감기에 걸리고


중국과 미국이 감기에 걸리면

한국 경제는 홍역을 앓는다능."


 

"헐!"


이런 가운데 기업들은

모험을 자제하고 보수적으로 변했다.

 

 

"IMF 때 한번 호되게 맞았더니

다음부터는 몸을 사리게 되더라능."

 

때문에 기업들은

투자를 기피하게 됐고


은행들도 위험한 기업대출보다는

가계대출에 주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업들이 투자를 기피하기 때문에

한국의 성장동력들은 점점 줄어들게 됐지."

 

 

"안타깝네.

최근 잠재성장율도 많이 떨어졌던데."

 

이런 가운데 은행의 가계대출 비중은 

20%선에서 40% 이상으로 치솟았다.


"은행들은 위험하게 

기업에게 돈을 꿔주기보다는


개인들에게 월급이나 주택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해주면 

훨씬 더 짭짤하다는 것을 알게됐지." 

 

 

"그래서 요즘 주택담보금으로

장사를 해보려는 자영업자들이 많아진 것이구나."


이런 까닭에 최근 가계부채 수준은

심각할 정도로 높아졌다.



한편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급증으로 

노동시장은 많이 유연화됐지만


중산층이 감소됐다는 점 또한

피할 수 없는 문제점이었다.


"지난 10년간 중산층은 75%에서 

65%로 줄어들었고

 

반대로 빈곤층은 10%에서 

15%로 늘어났지."



 

"헐!"


결국 우리 경제는 

많은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IMF 사태 이후 

긍정적인 부분들도 많았다.


그동안 수출주도의 경제정책은 주효해서

경제는 꾸준히 성장했고

 

2000년대 들어 한국은 세계가 공인하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참고


▲ IMF 발표 선진국


구조조정을 통해서 

우리 경제는 한층 더 유연해져서


개인은 직장보다 

직업을 더 중요하게 되었고


기업은 규모보다 

전문성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경제 전반에 만연된 불건전한 모습들은 

많이 해소됐고 보다 투명해졌다.

 

특히 2008년도에 세계를 휩쓴

글로벌 위기 속에서도 


한국 경제는 용케도 

파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1997~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에서 배웠던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IMF 사태로 인해

한국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됐다는 점이다.


비록 잃은 것도 많았지만

덕분에 얻은 것도 많았다.

 

혹자는 어차피 한번은 치뤄야 될

통과의례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출처 - http://blog.naver.com/alsn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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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의 한국경제

 

● 해방과 당면과제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독립을 맞는다.



"대한독립 만세~!!"

 

사람들은 해방감으로 들떴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그야말로 장미빛 청사진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했을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냉엄했다.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가들의 경우

정치적 독립이 

경제적인 풍요를 기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체제를 통해

길들여진 종속적인 경제구조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면서


예기치 않았던 문제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독립을 하게되면 


자원을 팔아서

이전보다 더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그렇지 못했어."


 

"왜?"


"그동안 피식민지 국가들은

식민국(지배국)들의 입맛에 맞춰

산업 단지가 조성되어 


자신들의 생산품을

고스란히 식민국으로 팔아먹는 구조였는데


독립과 동시에

그런 수출길이 끊어지게 되면서


대부분 나라들은 

외환(달러)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거든."


 

"그래서?"


"외환이 부족하면

필요한 원자재나 자본재를 구할 수 없어서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들은 

자급자족으로 해결해야하는데


그렇게되면 필시 

국제경쟁력에서 낙오하게 되지."


 

"아! 그래서 신생독립국들은 

대부분 가난한 것이구나."


그런데 이런 모순은 

한국 또한 피할 수 없었다.



일본으로 쌀을 수출할 수 없었고

만주로는 군수 물자를 수출할 수 없게됐다.


▲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주요 교역루트


갑작스런 교역 중단으로

신생독립국 한국은

심각한 외환 부족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뜬금 없는 남북 분단으로

전력 공급마저 대거 차단되는 등



북쪽과는 물적, 인적 교류도 단절되어

그 고충은 배가되었다.



● '돈을 찍어' 경제를 일으키려던 이승만 정권


이승만 정권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얼핏 이해 하고는 있어서 


비록 형식적이기는 했지만,

민주주의 코스프레를 어느 정도 구사했지만



경제적으로는 

기본적인 개념조차 거의 없었다.


"단지 돈을 열심히 찍어서

돈의 가치(금리)만 떨어뜨리면


기업들이 싸게 은행에 대출을 받을 수 있어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뭐,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야.


싼 대출로 1950년대 한국경제는 

연평균 4%의 성장율을 보였고

공업 분야는 매년 20%씩 성장했으니깐."


 

"뭐야, 생각보다 괜찮은데?"


"하지만 이건 '저금리빨'이라기 보다는

미국의 '원조빨'이라 볼 수 있었어."


"또 당시 농촌에는 

☞위장실업자들이 바글바글해서


공장만 세우면 거의 헐값으로

노동력을 구할 수 있어서


이런 특수 때문에 

기업들은 빠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어."

▲ 도시로 몰려든 실업자


 

"아! 그래서 이병철, 정주영 같은 사람들이

당시에 일확천금을 만질 수 있었던 거구나!" 

▲ 정주영(좌)과 이병철(우)


"하지만 문제는 인플레이션이었어.


돈을 마구 찍어댔으니 

필연적인 결과였지.


당시 한해 평균 15~20%라는 

살인적인 물가상승이 있었거든."



 

"헐!"


"만약 100원짜리 물건이 있다면

4년 후에는 200원 정도가 되는 수준이었지."


 

"그런데 인플레이션은 왜 나빠?"


"만약 돈을 빌리면서 

1년 이자율을 10%로 약속했는데


그 사이에 물가가 

20% 오르면 어떻게 되지?"


 

 

"어? 돈 꿔주는 사람만 손해네."


"맞아. 대신에 돈을 꿔간 사람은 

그만큼 공짜 이익을 챙기고.."


 

"아!"


"이런 사례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월급이 정해진 봉급쟁이들은 

손해를 보지만


그 월급을 지급하는 사장은 

상대적으로 이익을 챙기게 되지."


 

"그래도 노동자들이 물가가 올랐다며

임금을 더 달라고 주장할 수도 있잖아."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


그런데 그렇게 임금을 더 많이 받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어."


 

"왜?"


"임금이 늘어난만큼(사실 실질 임금은 전혀 늘지 않았지만)

나라에 세금을 그만큼 더 내야하잖아."


 

"아!"


"결국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돈을 꾼사람, 사장님, 기업가, 국가 등은

앉아서 공짜 이득을 챙기게 되는거임."


 

"어라? 대부분 가진 자들인데?"


"맞아. 인플레이션으로 손해보는 건 

대부분 서민들이지. 


그래서 인플레이션이 

한번 제대로 터지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경제 전체적으로 불신이 쌓여서

결국엔 경제가 침체하게 되는거임."


 

"아! 인플레이션이 나쁘다, 나쁘다고만 들었는데

이런 폐단이 있었구나."


사실 이렇게 돈을 찍어 

금리를 낮추고 기업 투자를 유인하는 수법은


후진국 경제에서는

매번 상투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하지만 낮은 금리와

높은 인플레이션율로

 

돈을 꿔가려는 사람은 많아도

돈을 꿔주려는 사람은 사라지게 된다.



때문에 은행에 저축을 하려는 사람은 줄어들고

결국은 나라에서는 

성장에 필요한 투자자금이 고갈되게 된다.



"은행에서 꿔줄 돈이 없다니깐-_-"


그렇다면, 투자 자금이 없는 국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해외에서 돈을 꿔오던지 해야하는데..


누가 불량한 나라에 

돈을 함부로 꿔주겠는가!



결국 또 돈을 신나게 찍는 것이다.


괜히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게 아니다.


"맥주 한잔 주삼."


한마디로 장기적으로 독이 되는 

'제살 깎아먹기'식 미봉책인 것이다.


그런데 1950년대 이승만 정부는

이런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으니 


당시 우리나라의 국내민간저축률은 

고작 1.4%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빈부격차는 심화되어갔다.



● 미국에 절대 의존하던 '원조경제'


1950년대 한국 경제를 유지해 준 것은

사실 뭐니뭐니해도 미국의 원조였다.


▲ 1957년 미국의 원조 식량 환영식


이유는 이랬다.


한국전쟁과 동유럽의 공산화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냉전체제가 접어들면서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제3세계의 나라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각각 어느 줄에서 설지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각각 어떤 체제가 더 우수한지를 놓고

일대 자존심 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미국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면서


군사적·비군사적 원조금을

마구 들어붓기 시작했다.


"1946~1962년 기간 중 

미국은 유럽의 재건과 동아시아의 성장을 위해

마구 돈을 지원해줬는데.."


 

"그런데?"


"이때 미국이 원조한 액수로 보면

국가별 원조규모에서 


단연 한국이 1위였어.

2위가 대만이었고.."


 

"헐!"


 

"어떻게 도와줬지?"


"직접적으로 돈을 주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식량, 의료품, 석유, 시멘트,

자동차, 의복, 잡화류 등등

주로 생필품에 관련된게 많았지."


 

"액수는 어느 정도였는데?"


"1953년 우리나라의 GDP가 13억달러였는데 

이때 미국의 원조액이 3억 달러였으니깐


당시 우리나라의 GDP의 1/4을

원조가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지."


 

"뜨악!"


"원조가 본격적으로 줄어드는

1961년에도 미국의 원조액은

 

우리나라 GDP의 10%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1950년대 한국 경제를 말하면서

미국의 원조를 빼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처럼 당시 한국 경제에 있어서 

원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 1958년 한강다리 준공 


하지만 '인간의 심리'라는게 그렇다.


마냥 받기만 하다보면

피동적으로 되어 홀로서기를 못한다.


이미 이때부터 한국 내부에서는

원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싹트고 있었으니


이러했다.


 이승만

"왜 우리는 미국한테 

해마다 막대하게 받아먹고 있는데

경제가 발전을 못하는가?"



"각하,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겠지만

알고보면 속빈 강정입니다."


 이승만

"무슨 말인가?"


"평소 원조하는 품목이나 규모는 

오직 미국이 꼴리는대로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의사와 필요는 

전혀 반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건 

밀가루, 약품, 설탕, 시멘트 같은

소비재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것들을 만들 수 있는

기계와 장비입니다."


 이승만

"앞으로 기계 달라고 하면 되잖아?"


"안줍니다.-_-"


 이승만

"왜 안줘?"


"사실 미국이 원조하는 이면에는


구호 원조의 대가로

수혜국의 지배를 강화하고


경제적으로 이익을 확보한다는

목적이 있어서리.."


 이승만

"그렇구먼.

기계를 안주는 이유가 있었어."


때문에 당시 미국의 원조는

수혜국의 경제개발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수혜국의 

산업 구조를 왜곡시키고


대외종속을 강화하는 

모순을 낳고 있었다.


▲ 판잣집에서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던 당시의 국민들


"사실 미국이 생필품 위주로

후진국들을 원조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어."


 

"그게 뭔데?"


"후진국들에게 원조한 물품들은


쉽게 독재정권의 유지 수단이나

특권층의 부정축재 수단으로 전용되었거든."


 

"아! 요즘 아프리카, 북한에서 

자주 보는 상황이네."


"맞아. 이승만 정권 때도 그랬어.


정부는 원조 물품을 배분하면서

권력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생활 개선보다는

부정부패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었지."



결국 무능력하고 부패한 사람이


왜 돈만 주고,

돈 버는 방법까지 알려주지 않냐고

불평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1960년대 한국 경제


● 위기의 1960년, 원조 정책의 전환


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 경제는 참으로 답답했다.


미국에게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조를 받아먹고 있으면서도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시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는 

독립국 중에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인도와 더불어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었다.


하지만 이는 

우리와 같은 시기에 식민지배를 벗어나

뻐르게 성장을 하고 있던 


다른 이웃국가들과 비교해보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대만은 1950년대 초반부터

착실히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여


매년 10% 가까운

고속 성장을 하고 있었고


▲ 1960년대 타이페이


북한도 소련의 지원을 받아

매년 두자리수의 초고속 성장으로


공산권에서 흔히 북한은

'제2의 일본'으로 불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때 미국의 원조 정책이 변했다.


"이젠 우리 경제도 어려워.

더 이상 공짜 원조는 없음."


 이승만

"헐! ㅠㅠ"


"대신 차관으로 꿔주겠음."


이유는 이랬다.


1950년대 전세계는 

장기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고


이때 유럽과 일본의 경제는

고도 성장을 맞게 되는데

 

값싼 공산품이 미국에 쏟아지면서

미국은 점차 

국제수지 적자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 1960년대 초반 일본의 주요 수출품 : TV, 라디오, 전화기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은

공산권과 경쟁하겠다면서


막대한 원조를 

다른 나라에 투여하고 있었으니


미국 내 여론이 좋지 않았다.



"당장 원조 중단해!"


때문에 미국은 원조정책을 

전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한국 경제는 

심하게 타격을 받았다.


"한창 원조를 받고 있던 1957년에는 

경제성장률이 8.1%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1960년에 가면 

2.3%로 뚝 떨어지게 되지."


미국의 원조 물자가 줄어들자

원조 물자에 의존해서 성장하던


기업들이 단박에

공급줄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 1960년대 대구

 

"이병철의 물류업(삼성물산), 제당업(제일제당)

정주영의 건설업(현대건설) 등도 


설탕, 밀가루, 시멘트와 같은 

소위 삼분(三粉 : 3가지 가루)이라는 

원조물자에 의존해서 성장했던 기업이니 


당연히 크게 휘청거렸지."



뿐만 아니다.


그동안 원조 물자의 독점적인 배분으로 

국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관료들도 


원조가 끊기자

정부 지배력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사실 4.19라는 정치적 변혁이 

딱 이 시점에 일어나게 된 원인도


바로 이런 경제적 배경 하에서

나타나게 된거였음."




 

"아!"



● 군사정부의 등장과 포퓰리즘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군사 정권이 집권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사실 경제개발계획은

이미 1950년대 후반 때부터 구상하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 때는 이랬다.


 이승만

"1960년부터 연평균 5.2%의 성장을 목표로

3개년 개발정책을 수립하겠다능."


4.19를 통해 집권한

민주당 정권 때는 이랬다.


 윤보선

"앞으로 연평균 5.6%의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5개년 개발정책을 수립하겠다능."


그러다가 이 계획의 실제 추진을

박정희 정권이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왜 꼭 굳이 군사정부에 의해 

추진되었을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60년 미국의 원조 정책이 수정되자

한국 경제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고


누군가 나서서 

위기를 타파해주기 바라고 있었지."


 

"그런데?"


"사실 당시에는 군부 집단 외에는

한국에서 그런 능력을 갖춘 집단이 없었어."


 

"어째서?"


"기존의 정당으로서는 

이미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정책을 입안하고,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있게 밀어붙일 수 있는 

집단이 필요한데


그걸 가진 집단이 

군부밖에 없었거든."


 

"아!"


다만 군사정부가 처음부터 

수출주도 정책으로 

성장을 모색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군부는 1950년대 식의 

내수지향 성장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사실 초기 군사정부는 많이 서툴렀어.

그래서 포퓰리즘 적인 정책을 

남발하고 말았지."


 

"어떻게?"


"이런게 있었음."


농어촌 고리채 정리 : 고리대금업 나빠!



농산물 가격 강제 유지 :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영농자금 방출 : 가난한 농민을 위해!



비료·농약 외상 배급 : 가난한 농민을 위해!



화폐개혁 : 부자들의 숨겨놓은 돈 회수!

 

 

"이런 것도 있었지."


댄스 금지 : 사치 단속과 미풍양속 위함!



쌀가게의 쌀을 강제압수 : 그리고 무상 배급!



"헐, 가난한 사람 

구제하겠다는 생각도 좋지만


너무 사유재산을 

함부로 침해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당시 혁명의 주체는 군인들이어서

경제를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부족했으니깐."


하지만 이는 미국의 권고와는

전혀 상반된 것들이었다.


"아놔, 한국은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경제가 안정될 수 있데도

일을 더 크게 벌여놨네!"


"포퓰리즘으로 

아까운 재정 탕진하지 말고


원화가치 평가절하해서 

수출 좀 해봐.


언제까지 우리가 도와주기만 바랄래?"


그리고 군사 정권의 

포퓰리즘 정책들은


불과 1~2년만에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재정압박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외환(달러)부족은 

박정희 정권으로 하여금


미국의 권고를 수용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

"달러가 있어야 

뭔 일을 해도 제대로 해볼텐데..


미국은 원조를 점점 줄이고 있으니, 

앞으로 무슨 수로 달러를 구한담?"



"물건을 만들어서 

수출을 하는 수 밖에 없을듯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군사정부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달러의 수급을 위해서


'수출'을 새로운 대안으로 

채택하게 된 것이었다.


▲ 1960년대 중반 섬유(면방직) 수출



● 수출주도정책 : 달러를 확보하라!


수출 주도로 

성장의 방향을 바꾸자


한국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 있어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애초에 군사정부는

'잘 살아보겠다'고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성과야말로

정권의 정당성과도 결부되는 일이었거든."


"아!"


여기에 군사정부는 행운도 따랐다.


"어떤 행운?"


"1960년대 세계경제는 

지속적으로 호황이 유지되고 있었는데


특히 선진국들은

연 4% 이상씩 성장을 하고 있었던 터라


높아진 소득으로 

수입품에 대한 수요가 높았어."


"그래서?"


"이 당시 수출주도형으로 발전을 

모색했던 국가들은


대부분 고도성장을 

만끽하게 되었지."


"그리고 내부적으로도 

군사정부는 행운이 따랐어."


"어떻게?"


"원래 독재정부의 개혁은

국민들과 이해관계의 차이로 

충돌을 벌이기 십상이거든."


"그렇지."


"그런데 당시 정부가 말한

성장위주의 정책은


기업들에게는 기회를 제공했고


국민들에게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줬기 때문에


정부 정책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 특이해."




즉 군사정부의 권위주의 정책은

본인들을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여론과도 일치했기 때문에


정부의 개혁은 한층 더 빠르게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수출주도 정책의 성과는 

통계수치를 통해 보면 명확해진다.


경제성장율은

1966년 건국 이후 최초로 10%라는

두자리 수의 성장률을 기록하게 되고


1968년에는 12.6%,

1969년에는 15%의 성장율을 기록하게 된다.



수출에 있어서는

1960~1971년 사이에만 약 33배 증가했다.



다만 이렇게 열심히 

수출을 한 이유 중 하나는


달러를 확보하고 

그것을 가지고 


해외의 원자재와 기계를

구입하기 위해서였음으로


이 시기 수출이 증대하는 만큼 

수입도 꾸준히 늘어나서


오히려 무역수지 적자는 

지속적으로 쌓여만 갔다.


▲ 인천항의 원료 수입


결국 수출 주도에 의한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수출 산업은 

원료의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었고


중간재, 자본재 산업은 

여전히 취약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 1960년대 서울역 전차


특히 1965년 한국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하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는

당시 국내 GDP의 10% 정도나 되는 

3억달러의 차관을 도입할 수 있었지만



일본식 기술을 

고스란히 도입함으로서


이후 중간재, 자본재의 수입에 있어

일본에게 절대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고


이런 구조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해

매년 엄청난 액수의 대일 무역 적자를 

양산하고 있는 중이다.





1970년대 한국 경제


●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 : 오일쇼크와 베트남 패망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자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미국과 서유럽 넘들

니들 자꾸 이스라엘 편애할래?"



"맞아. 앞으로 계속 그러면

석유 한방울도 팔지 않겠어!"


이렇게 기름쟁이들이 으름장을 놓자

국제 석유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알았어. 쏘리!

앞으로 이스라엘 편애 안하고

니들 말 들을게. 어서 석유 풀어."


이른바 '자원민족주의'의 대두였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로

세계 경제는 일대 휘청거렸고



50~60년대의 기나긴 

세계 호황기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경기불황이 나타나자 

그 여파는 세계 전체로 확산되어 



선진국들의 소비심리가 

크게 추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선진국들이 택한 방식은

'보호무역주의'였다.




"경기도 안 좋은데 

후진국의 무분별한 값싼 물건

(특히 의류, 신발과 같은 소비재) 때문에

달러가 자꾸 빠져나가."



"맞아! 앞으로 후진국 수입품에

그만 혜택을 주고

관세를 팍팍 매겨야 한다능."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장 크게 철퇴를 맞게된 것은


한국과 같은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선진국으로 수출을 하고있던 국가들이었다.

 

위기는 또 있었다.


1971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공을 방문해 관계를 정상화하더니



1975년에는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떼고 나왔고


그랬더니 인도차이나 반도는

순식간에 공산화 되었다.



게다가 미국은

주한미군도 감축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가 

약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했으니 한국은 똥줄이 탔다.


즉 1970년대는

선진국의 보호무역으로 


기존의 수출위주의 생산전략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고


미국의 발뺌작전으로

기존의 방위체계에도

커다란 불안을 조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 중화학 공업으로의 전환


수출 주도 성장 전략으로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 성장을 구가하던 한국 경제는


1970년대 초반 

커다란 위기를 맞게된다.


▲ 1972년 서울 압구정동


무엇보다 국제수지가 

매우 악화되고 있었다.


선진국의 보호주의로

수출은 크게 둔화되고 있었는데


반대로 국제 유가는 

무섭게 오르고 있었으니


무역적자액은 

심각할 정도로 커진 것이었다.


▲ 1973년 오일쇼크 당시 주유소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대규모로 도입했던 차관의 원리금 상환이 

하필 이 시기에 시작됐으니


이 시기 달러의 잔고는 

텅텅 비게 되었다.


 박정희

"무슨 방법 없어?"


"각하, 우리도 이참에

중화학 공업을 일으키는 겁니다."


 박정희

"그러면 정말 괜찮아져?"


"물론입니다.

지금 선진국들은 탈공업화가 유행이랍니다."


 박정희

"탈공업화? 그게 뭔데?"


"지금 선진국들은 인건비가 높아 

도저히 경쟁력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자국의 공장을 뜯어서

아예 해외로 옮기는게 유행이랍니다."


 박정희

"그래서?"


"그렇게 요즘 옮기고 있는 분야가

중화학공업 중 조립가공 산업이라고 합니다."


 박정희

"조립가공 산업? 그게 뭥미?"


"자동차, 조선, 가전제품 들은

부품을 구입해서 조립만하면

쉽게 내다팔 수 있는 산업들입니다."


 박정희

"이런 걸 선진국들이 

해외로 옮기려는건 무엇 때문인데?"


"그다지 기술이 필요한 

산업이 아니기 때문에


인건비가 낮은 곳일수록 

경쟁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좋아, 우리가 이런 공장을 만들면

선진국하고 붙어도 승산이 있다는 얘기군."


"맞습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을 하게 되면

또 다른 이점이 있습니다."


 박정희

"그게 뭔가?"


"자동차, 중장비기계, 조선

이게 다 뭔줄 아십니까?"


 박정희

"..."


"중화학 공업이면서도

바로 군수공업입니다."


 박정희

"옳거니, 경제도 일으키고 

국방문제도 해결해 보자는거구나."


"맞습니다. 

가뜩이나 요즘 미국에서 


하도 발뺌을 하겠다고 

난리쳐서 걱정이었는데,


이참에 중화학공업으로

우리도 자주국방을 확립해 보는겁니다."



● 중화학공업을 위한 자금마련


하지만 중화학 공업을 일으키자니, 

돈이 적잖이 들어간다.


도대체 자금은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당연하겠지만, 당시 한국은

없는 살림에 재원을 만들기 위해


재정, 금융, 조세 등 

모든 방안을 동원하고 있었으니..


이러했다.



① 정부 투자


일단 정부가 나서서 

직접 투자를 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게, 

대표적으로 포항제철이었다.

(정부가 일정 부분을 투자했다.)


 박정희

"임자, 철은 산업의 쌀이야. 

쌀이 있어야 밥을 해 먹지 않겠나? 


그러니 자네가 

제철소를 하나 지어줘야겠어."


 박태준

"넵."


또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정부가 민간기업에 

직접 대출해주기도 했다.


1962~1978년 이러한 정부의 투자는

국가 재정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GDP의 약 6%에 해당하고 있었다.



② 금융 특혜


하지만 정부가 직접 투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정부는 대대적으로 금융 특혜를 부여했다.


"금융 특혜가 뭥미?"


"기업에게 저렴한 이자로 

돈을 대출해주는 거지."


"당시에는 중화학공업에 

투자하겠다고 하면


파격적인 수준으로 자금을 지원해주고

이자를 낮춰줬기 때문에


한가닥 하는 큰손들은

죄다 중화학공업에 투자하겠다고 손을 벌렸지."



때문에 당시 대출 자금 중

중화학 공업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3년 71%에서 

1976년에는 87%까지 상승하게 된다.


 박정희

"임자, 배 한번 만들어 보는거 어떻겠나?"


 정주영

"그게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박정희

"무조건 해!"


그러자 정회장은 

거북선이 그려진 오백원짜리 지폐한장 들고 



유럽을 떠돌며 비즈니스를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다만 이 비즈니스에 

대한민국 정부가 무려 '보증'을 서줬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다.



③ 조세 특혜


중화학 공업에 대한 특혜는 

이 뿐만이 아니었으니



당시 중화학공업에 투자한 기업들은


처음 3년간은 100% 면세, 

다음 2년간은 50%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설비를 구입할 때마다 

그 액수만큼 세액공제와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이런 파격적인 조세 혜택은

오직 중화학공업에만 해당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했으니 


정부는 부족한 재원을

민간에게서 팍팍 뜯고자 했다.


때문에 GDP대비 조세 부담률은

1973년 12%에서 1979년 17.4%로 상승하게 되었고


▲ 1970년대 서울


이 당시 부가가치세가 새로이 도입되고

각종 조세공과금이 신설된 것도 


사실은 중화학공업에 막대한 특혜를 주면서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 1970년대 부산

 

"결국 국민들의 희생으로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오늘날 대기업이 

그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임."


"아!"



④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중화학 공업화의 정책 일환으로

당시 정부는 SOC 투자에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1970년에 만들어진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건설된 도로였다지."



"아!"


"하지만 가장 많은 보수비가 든 

고속도로이기도 하고.."



● 고도성장과 후진국 탈출


한국 경제가 1960년대 초반을 계기로 

수출 주도 정책으로 전환한 이후 


경제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는 세계 경제가 

호황 일변도에 있었고


▲ 1960년대 폭스바겐 자동차 공장


선진국의 호경기에 편승하여

고성장을 이룩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경제의

진정한 도약은 1970년대 이후였고


그 원인은 바로 

중화학 공업화 정책에 있었다.

(같은 시기 대만도 중화학 공업의 길로 들어선다.)


이런 부분은 동아시아와 중남미 국가들의

경제사를 비교해보면 확연해진다.


▲ 우리나라의 연도별 경제성장율


1960년대까지 사실 

동아시아와 중남미 국가들 간의

경제적 성취는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두 지역은 확연히 갈리게 된다.


이유야 뻔했다.


한국과 대만은 

오일 쇼크라는 변화에 재빨리 대응하며


중화학공업이라는 

'캐쉬 카우'를 가지게 되었지만



중남미는 어영부영 하다가

경공업 일색의 산업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중화학공업이라는

자산을 가지고 있던 한국경제는


1973~1976년 세계경제가 1차 석유파동으로 

엄청난 불황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연평균 11.2%라는

경이적인 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었다.



다만 2차 오일쇼크 때인 1979~1980년 경에는 

잠시 상승세가 중간에 꺾이기는 했어도 


곧바로 다시 회복했고

그렇게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계기도


중화학 공업이라는 

자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한국은 더 이상 후진국으로 불리지 않게 됨."

(물론 개발도상국 범주를 벗어나려면 20년이 더 걸리지만)


"어, 그랬어?"


"1인당 소득은 중남미, 동유럽 국가들 수준은 됐고

경제 규모는 세계 24위였으니깐."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을 얕잡아보던

필리핀보다 1인당 소득이 

3배 더 높아지는 시기였지."



● 정부주도형 성장의 문제점


하지만 겉으로 들어나는

화려한 성과의 이면에는


여러가지 부실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발생한 문제점들이

20년 후 IMF 사태의 

주요한 단초가 되기도 했다.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① 비효율적인 투자


70년대 당시에는

중화학 공업의 성장을 위해서


온갖 특혜와 지원들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걸 노리고 대기업들 간에는

과잉 경쟁이 나타나게 되었고


막대한 중복 투자와 

과잉 투자가 판을 치고 있었다.

 

또 문어발식 확장도 

만연하게 된다.




"정부가 대기업이라면 

무조건 쉴드쳐주고 


특혜를 주고 있는데,

일단 저지르고 보는거야."



"그렇구나! 대마불사!"


하지만 이러한 과잉 투자의 결과로 


기업은 부실해지고

가동률은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특히 1979년 2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고 

글로벌 경제의 침체로 수출길이 막히자 


당시 대부분의 중화학 공업은

줄줄이 파산의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


▲ 당시 택시들은 기름값 때문에 단체로 영업을 중지하기도 했었다.


사실 1979~1980년의 

사회적 위기였던

 

부마항쟁 → 1026사태 → 1212사태 → 518운동


▲ 부마항쟁


이라는 일련의 사태도

그 원인을 파고들자면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② 산업연관 효과가 극히 낮았다.


중화학 공업의 본래 목적은 


연관 효과가 큰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함으로써 


그 파급효과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산업 연관 효과가 뭥미?"


"만약 라면 공장을 하나 만들어봐."


"만들면?"


"그러면 밀가루의 수요가 늘어나서

밀농사가 더 성장하게 됨.


또 라면 생산이 늘어나서

분식점이 더 많이 들어서게 됨."


"그래서?"


"즉 라면 공장 하나만 만들었는데


경제 정체적으로는

밀농사와 분식점 장사까지 

더불어 흥하게 되는거임."


"아!"


"이런걸 ☞연관효과라고 함."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중화학 공업은 

결코 의도한만큼 

연관효과가 컸던게 아니었다.

 

중화학공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당시 우리나라가 

도맡아 했던 것은


조립생산(노동집약적)으로 

최종재를 만드는

전자, 조선 산업들이었기 때문에

 

부품(기술집약적)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부품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조립생산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연관효과가 작았다는 얘기군."


또 당시 우리나라가 주력했던

중화학 공업의 제품들은


비료, 시멘트, 자동차, 가전 기기 등으로

대부분 그 자체가 최종 소비재였다.


"중화학공업으로 만들었던 제품들도

대부분 최종소비재였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추가적인 가공을 하기가

힘들었지."


결국 이래저래

산업연관효과가 크지 않아서


공장을 짓더라도

원하는만큼의 경제적 이득을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 자동차 부품들


70년대 후반 산업연관효과를 살펴보면


일본의 경우 60% 선에 이르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40% 안팎에 그치고 있었다.



이렇게 당시 중화학공업의 투자가 

비효율적이었던 것은


애초에 설립된 과정이

자연발생적이 아닌, 


인위적이었다는데서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활로를 모색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라는 

딱지를 떼어낼 수 있었고


곧 선진국으로 가는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비록 최고는 아니었지만

최선의 방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출처 - http://blog.naver.com/alsn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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