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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울릉도와 독도


● 울릉도는 어떻게 우리 땅이 되었나?


울릉도는 1416년부터 시작해서 468년간

한국인이 살지 않았던 섬이었다.




그렇다고 무인도는 아니었다.


일본인 어부들이 오고 가면서 

고기도 잡고, 벌목도 하던 곳이었다.


어라?



분명 삼국시대부터 

울릉도는 우리의 영토가 아니었나?


물론 우리 영토였다.

일본 스스로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데스"


그런데 울릉도에 조선인들이 살지 않았던 까닭은

조선의 케케묵은 공도정책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6세기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를 점령했지만

점령을 했을 뿐, 완전히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사부


11세기까지 울릉도는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고려 왕조가 세워지자 

고려에 조공을 바치면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진족 해적들이 대거 울릉도로 쳐들어오자

울릉도는 쑥대밭이 되었고,


▲ 여진족은 흔히 기마민족으로 알려졌지만, 해양활동도 활발했다.


이때 많은 울릉도 유민들이 

고려 땅으로 피신해 오게 되었다.


울릉도민

"살려주삼."


그리고 13세기 여진족의 금나라가 망하자,

유민들은 다시 울릉도로 돌아가게 됐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울릉도는 고려의 영토로 복속되게 된다.


특히 고려 후기가 되면, 

권문세족의 수탈이 날로 심해졌기 때문에


많은 고려 백성들이 세금과 병역을 피하기 위해 

울릉도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되었다.


당시에는 왜구의 출몰로 나라의 근심이 깊었다.


"전하, 근자에 왜구들이 

울릉도를 약탈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태종

"어허, 그넘들이 그런 외딴 섬까지 쳐들어갔단 말인가?

벼룩에 간을 빼먹을 넘들이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사옵니다."


태종

"뭔데?"



"울릉도 주민들이 

왜구와 결탁하여 해적질을 돕게 된다면

앞으로 엄청난 화근이 될 겁니다."



 태종

"그렇구나. 근자에도 우리 백성들이

왜구를 사칭하여 가왜(假倭)를 조직해서 ☞ 참고


해안마을을 도륙질하는 경우가 있다던데,

분명 그리될 수도 있겠어." 



"그래서 말인데, 이들 울릉도 주민들을

죄다 육지로 이주시키고 


앞으로 울릉도를 

무인도로 만드시는 건 어떨는지요."



 태종

"옳거니. 그리하라!"


그렇게 해서 조선시대에 울릉도에는

'공도정책'이 실시되게 된다.



이후로 울릉도는 공식적으로 무인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섬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17세기 초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울릉도를 찾은 사람들이 몇몇 있었으나 


이미 들어와 살고 있던 왜인들에게 

곧 내쫓기게 되어 정착할 수가 없었다."



"현재 울릉도는 완전히 

왜인들에 의해 점령되어버렸다" 


아예 일본 막부에서

일본인들에게 울릉도의 삼림채벌권과

조업권을 내어주는 일까지 발생했다.


사실 조선 정부는 울릉도라는 섬의 존재를
거의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17세기 후반, 안용복이라는 어부의 노력으로
겨우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땅'임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때는 1693년(숙종 19년)의 일이다.


안용복은 울산 출신의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런데 울릉도에는, 이미 많은 일본 어부들이 있었고

그들은 조선 어부들을 보자 곧 항의를 했다.



"여기는 일본의 영토이무니다!"



 안용복 

"문디자슥들, 여그는 우리 땅이다. 

니들이 와 남의 땅에 와서 고기를 잡고 있노?"


참고로 부산 태생 안용복은 어렸을 적부터 

초량왜관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일본말에 능통했다.


그렇게 실랑이가 오고 가다

육박전이 벌어졌고,



결국 쪽수에서 진 조선 어부들이

일본 본토(돗토리현 호키)로 끌려가게 되었다.



인질이 된 안용복은 화가나서 따졌다.



 안용복 

"마, 보소! 조선사람이 조선땅에 

들어간건데 우예 그럽니꺼?"



 호키 태수

"정말 거기가 니들 땅임?

막부에 물어볼테니깐 잠깐만 기둘려."


그랬는데, 곧 막부에서 전갈이 왔다.



 호키 태수

"어라? 울릉도 땅이 니들땅 맞았구나."


사실 당시 일본 막부에서는 

설마 조선이 울릉도 같은 섬에 신경이나 쓸까 싶었는데


다짜고짜 울릉도 얘기가 나오니,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쇼군 

"요즘 조선과는 사이가 좋아졌는데,

이런 일로 또다시 분란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안용복 일행을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게 되었고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조선 정부에게 통고하면서 사과했다.


하지만 귀국한 안용복에게

조선 정부는 곤장 100대로 다스렸다.



 동래부사 

"아니, 이넘들이 감히 국경을 넘어갔어?"


한편 조선정부는, 일본에서 난데없이



"울릉도는 조선 땅이 맞스무니다."


라고 나왔기 때문에

어리둥절하다가도..



 숙종

"맞아! 거기가 우리 땅이었지."


곧 일본 정부에 이렇게 요구했다.



 숙종

"앞으로 울릉도에 

왜인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주삼."

 

그러나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확인 받은 이후로도

조선은 200년 동안을 계속
공도정책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도 
수많은 일본 어민들이 제집처럼 들어와 

삼림을 베어 가고,
어자원을 쓸어가고 있었다.

"아놔!"

그러다가 울릉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열강들의 식민지 경영이 본격화되는
19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1882년 고종은 무관 이규원을 불렀다.

 고종
"생각해보니 울릉도가 걱정일세.
거기가 요즘 어떤지 함 조사해보도록.."

 이규원
"넵."

그리하여 이규원은 울릉도 일대를 
샅샅이 조사하게 되었다.
(이때 독도로 추정되는 섬도 발견하게 된다.)

고종
"그래, 가보니 어떻던가?"

 이규원
"큰일이옵니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곧 일본에 빼앗길듯 싶습니다."

 이규원
"지금 섬에서는 일본인 수백 명이 
산림을 무단으로 벌채하고 있고
인근의 물고기를 싹쓸이하고 있었습니다."

 이규원
"아예 섬 내부에는, 일본국 송도(松島)라는 
팻말까지 세워져 있었습니다."

 고종
"허허, 정말 큰일이구나.
자칫하면 섬을 일본에 빼앗기겠어."

이런 이유로 고종은 
부랴부랴 공도정책을 폐지하게 되었다.

▲ 울릉도 초기 개척민의 집 (1884년)

 고종
"울릉도에 살 사람들을 모집해서
앞으로 그곳에서 살도록 하여라."

이때가 1884년이었다.
 


● 독도는 과연 우리 땅이었나?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평소 모두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열을 올리지만,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 물어보면

제대로 설명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단적인 자료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흔히 고지도나 고문서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되기는 힘들다.



예컨대, 16세기의 '팔도총도' 등을 보면서




19세기 '해동여지도' 등을 보면서



우리는 울릉도 옆에 있는 섬을 

쉽게 '독도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게 '죽도'가 아니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물론 죽도가 아닌, 

독도일 가능성도 높다는 주장도 있다.


대표적인 게, 고지도에는 독도로 추정되는 섬에

산봉우리가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 죽도에는 산봉우리가 없는데, 독도에는 봉우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의 섬은 독도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증거다'라고 내세우기에는

뭔가 좀 옹색하지 않는가!


게다가 이런 주장에는, 반박자료도 여럿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우산, 무릉의 두 섬은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도에 그려진 섬이 

죽도인지 독도인지는 더욱 불분명해진다.




가까운 거리라면 죽도가 맞겠지만,

청명한 날에 보이는 섬이라면 독도가 아니겠는가!


흔히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라고 우리는 배우고 있지만,


엄밀히 지리학적, 지질학적으로 따져보면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가 될 수 없다.


울릉도~독도간 거리는 87km로 

이는 서울~원주, 서울~천안 간의 거리와 비슷하다.




전라남도 완도에서 제주도간의 거리다. 


그런데 완도를 

아무도 제주도의 부속도서라고 하지 않는다.




지질학적으로 독도는

해저에서 화산 분출로 치솟은 화산의 봉우리로서


울릉도보다 200만 년 

먼저 생성된 화산섬이다.




지질학적으로 볼 때도

부속도서라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하지만 울릉도에서 

독도는 육안으로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그렇기는 하다.




다만 울릉도에서 독도 간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해발 130m 이상 위로 올라가야, 맑은 날에 육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부산 ~ 대마도 거리보다 

1.74배 더 먼 거리이기 때문에

부산 앞바다에서 대마도를 보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




서울~월미도 거리보다는 2배 이상의 거리이기 때문에

북한산 정상에서 인천 앞바다를 보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볼 수는 있지만, 

보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게다가 조선은 468년 동안이나 섬을 비워두고

1884년부터에야 울릉도에 사람이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 100년 전 울릉도 개척민의 집


인문학적으로도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가 되기 힘든 이유다.

(다만 1900년도 칙령을 발표하면서 독도는 행정적으로 울릉도의 부속도서가 된다.)


게다가 국제적인 시각도 역시,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전후 일본의 영토를 협의하는 연합국의 문서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따로따로 기재했었다.

 


18세기 조선 조정에 보고된 박석창의 '울릉도 도형'에는 

울릉도와 함께 우산도가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서 우산도는,

'대나무밭으로 우겨져 있는 섬'으로 기록되어 있다.




밭이 있는 섬이라면 독도가 아닌, 

더욱 죽도에 가깝다.


고로 우리나라 고지도와 고문서에 소개된 자료를 가지고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가 빈약하다.


때문에 독도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이런 부분들이 우리가 가진 '약점'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의외로 일본인들이 가진 고지도와 고문서들 중에는

'독도는 조선 땅이다'라는 식의 자료들이 여럿 출토되고 있다.




17세기 후반 안용복 사건 이후로,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라고 공식 인정했던 일본은


간헐적이기는 했지만, 

울릉도에 도해하는 어민들을 제제하고 있었다.




때문에 어쩌다 단속하는 날, 

재수 없이 걸려들면 목이 날아가는 식이었다.


1836년에도 울릉도로 무단 도해하다가

붙잡힌 어부의 처형 기록이 남아있는데,


당시 처형기록에는 친절하게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바로 이러했다.



사실 당시까지, 조선 정부가 독도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일본이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887년 일본 정부는,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하부기관(내무성)에 직접 하달하기도 했다.


이때도 지도가 그려진다.

서양인이 제작한 지도를 토대로 했기 때문에, 그 모습은 꽤나 정교해진다.




얄짤없이 독도가 맞다.




1894년 일본이 제작한 조선국지도에서도




독도를 조선의 영토에 포함시키고 있다.





● 독도는 어떻게 일본 땅이 되어버렸나?


일본은 원래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불렀고

독도를 마츠시마(松島)라 불렀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명칭이 뒤바뀌게 된다.




일본인 스스로 도해금지법으로

울릉도, 독도에는 비밀리에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에



▲ 독도에서 조업을 하고 있는 일본 어부들 (1936년)


일반인들에게 인지도가 낮았던 탓이다.



"다케시마? 마츠시마? 

모두 처음 듣습무니다."


그러던 중 19세기 후반, 서양 함선이 측량 과정 도중에

'마쓰시마'와 '다케시마' 명칭을 바꿔쓰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서양의 지도를

일본 해군성이 역수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울릉도는 마츠시마, 

독도는 다케시마가 된 것이었다.




"일본인들에게도 워낙 듣보잡 섬이었던 지라.."


조선 사람들이 울릉도, 독도를 거의 모르고 살았듯이

일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울릉도? 독도?"


하지만 정작 독도의 국제적 명칭은

'리앙쿠르 암초'로 알려지게 된다.


18세기 중엽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독도에 난파당한 뒤 붙여졌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섬이 아닌 암초로 명칭 된 것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바위섬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근대 일본에서는 

한동안 독도를 '리앙꼬루도'라 부르기도 했었다.




"리앙꼬루도는 우리 땅이 아니무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조선의 영토라고 해주고 있었고,


서양의 지도를 통해서도 

그 존재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당시 대한제국)은 스스로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하기로 했다.


바로 1900년, 대한제국 칙령에 의해서였다.

이때 독도의 이름은 '석도'였다.





 고종

"석도(石島)는 앞으로 울릉도와 함께 

강원도에서 관할하라능."


당시 대한제국의 칙령이 얼마나 

국제적으로 효력이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한제국은 

서양 여러 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었다.




때문에 정부의 공식적인 칙령이라면, 

국제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철저히 무시된 모양이다.


오히려 일본은 러일전쟁 도중인

1905년에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해 버린다.




"주인 없는 땅은 먼저 선점하면 임자데쓰!"


이때 재빨리 섬을 차지했던 이유는 

물개잡이를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여기 섬에서 물개가 많이 서식하무니다."




▲ 독도의 물개 포획 장면


그리고 등대도 세워진다.



▲ 일제에 의해 세워진, 독도의 등대


이럴때 조선은 무엇을 했나?

왜 반박하지도 못했을까?


사실 1904년부터 조선은 더 이상 나라가 아니었다.



러일전쟁으로 주둔한 일본에 의해 

한일의정서가 강제로 체결되었고,




일본인 고문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1905년, 

일본이 겨우 조그만 바위섬을 가져가겠다는데

딱히 뭐라고 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러일전쟁 기간 중, 

일본이 조선에 행했던 일들은 다음과 같았다.


고려왕릉을 도굴했다.


금광·어업권·포경권·인삼밭을 강탈해갔다.

울릉도에서는 무단 벌목도 이루어졌다.


화폐정리 사업이 실시되어

제일은행권 지폐가 강제 발행되었고, 

그렇게 찍어낸 돈으로 경부선이 만들어 진다.



 


하지만 이때 찍어낸 지폐는 

일본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일본에서는 통용이 안됐다.



 


재정·우편·전신·전화의 관리를 일본인이 맡는다.




곧 조선의 통신을 일본이 장악하게 되어,

외교문서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도 어렵게 된다.



 


토지의 착취가 시작된다.

일본은 당시 우리나라 땅의 1/4이 황무지라고 조사했다.



 


그러자 국민들은 땅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하고 있었다.



 


 

 


이승만 라인

● 2차대전 후, 연합군들이 생각한 일본의 행정적 영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했다.

이제 연합국의 관심은 과거 일본제국의 영토를 
어떻게 재편하느냐에 있었다.

1946년 1월, 
향후 일본의 영토에 대한 방침을 내린다. (SCAPIN 제677호)

내용은 이랬다. 





"앞으로 일본이 보유할 수 있는 영토는
4개의 주요섬(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에 국한함."



"울릉도, 독도, 제주도, 오키나와 제도, 
이오시마, 오가사와라제도, 쿠릴열도 등은 제외됨."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독도의 언급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따로 말한 것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 그럼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는 말이네.
역시 한국 땅이군."

하지만 속단할 수는 없었다.

독도가 제외됐다고 해서,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었다.

당시 연합군들은, 행정적인 구분을 한 것이었지
주권을 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1946년 연합국이 합의한, 행정구획도

실제로 이오시마, 오가사와라, 
오키나와제도는 도로 일본이 가져갔다.




때문에 당시 연합군이 내린 지침을 가지고
'독도 = 한국땅'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울릉도 인근의 독도가 제외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왜냐하면 울릉도는 
분명 한국으로 반환될 영토였기 때문이다.


● 러스크 서한 : 독도가 일본 땅이 되다

1947년 2월 극동사령부의 맥아더의 명령으로
일명 '맥아더 라인'이 설정되게 된다.

1946년에 행정 영토를 규정했다면,
맥아더 라인은 일본의 수역까지 지정한 것이었다.

▲ 맥아더 러인


이렇게 수역까지 규정했던 이유는,
일본 어선들이 무분별하게 세계 어장에 나타나, 

마구잡이로 남획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맥아더
"앞으로 일본 어선들은 이 선을 넘어가지 말라능!"

맥아더 라인이 공표되자,
독도는 보다 실질적으로 한국 영토로 편입되게 되었다.

▲ 당시 일본의 어선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때까지도 임시적인 조치였다.

실제로 일본의 영토는,
1951년으로 예정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결정될 일이었다.

▲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한편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위한 
초안을 미리 작성하고 있었다.

첫 초안은 1947년 3월에 작성됐다.

당시 독도는, 맥아더라인으로 규정을 했듯이
한국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1949년 2월 
일본국 정치고문 시볼드의 주장으로 인해 독도가 빠지게 된다.

참고로 시볼드는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외교관으로서
이후 일본인과 결혼하고, 일본에 귀화한 미국인이었다.

 시볼드
"다케시마는 일본의 땅임. 
1905년에 무주지 선점 원칙에 따라 편입한 곳임요."

 애치슨
"응? 그랬어?"

이런 이유로 독도가 제외되고, 
수정된 초안에는,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게 된다.

그리고 1951년 8월, 
한국 정부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서둘러 조약의 수정을 요청했다. 
이때 파랑도(이어도)도 요구했다.



"독도와 파랑도는 한국의 땅임요."

그러자 미 국무부는 
양유찬 주미 대사에게 물었다. 

 애치슨
"독도가 어디 있는 섬임요?"


 양유찬
"글쎄요? 울릉도인가? 
아니면, 다케시마 근처에 있는 섬이 아닐까요?"

라며 황당한 답을 했다. 
이게 화근이었다.




나흘 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미 대사에게 이러한 서신을 보냈다.

 애치슨
"지리학자뿐 아니라 한국대사관에서도 
독도와 파랑도의 위치를 확인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애치슨

"우리는 이들 섬에 대한
한국의 주권 요구를 받아들이기가 곤란하다."

3일 뒤에는, 미 국무부 극동지역의 보좌관이었던 
러스크의 서한이 비밀리에 한국으로 전달됐다.


 러스크
"1905년 이전에 독도가 한국 땅이었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하니,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넣어주기는 어려울듯 합니다."


참고로, 러스크 서한은 현재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의 주요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문서다.



 


일본 외교부에서 

10개국어로 번역하여 돌리고 있는 문서다.


그런데 러스크 서약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러스크는 강화회담의 주요 미국 대표도 아니었고, 

그의 견해가 미국을 대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극동 보좌관에 불과한 듣보잡의 서한서를 가지고

국제법상 효력을 주장할 수는 없는 일."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51년 9월)

전후 일본의 영토를 확정하고,
아시아 식민지국가에 대한 피해배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조약이 열렸다.




이때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그리고 아시아 각국 등 총 48개국이 참가했다.




그러나 정작, 한국과 북한,
중국과 대만은 초대조차 받지 못 했다.

한국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뭐냐고, 당사자도 없이.."

당시 조약의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다."
 



"일본은 대만, 쿠릴열도, 사할린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다."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이 신탁통치한다."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결과였다.

결국 리스크 서안대로 
독도가 일본 영토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도가 한국 영토로 언급이 되지 못했다.



▲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었다.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라서 제외됐겠지?"



"1946년 1월 초안에는 독도 따로, 울릉도 따로 언급했었다고."



"그렇다면 왜 하필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임?
우리나라에는 3천개의 섬이 있는데.."



"울릉도·제주도·거문도는 
위치상 우리 영해의 가장 바깥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된 것이었음."


● 이승만 평화선 : 이승만 라인 (52년 1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크게 격노했다.

 이승만
"이런 당치도 않은 일이...!"

하지만 그가 격노했던 이유는
영토의 상실보다는, 어자원의 상실 때문이었다.

독도가 제외됐다는 것은
곧 영해가 축소된다는 사실이었고,
그것은 곧 어획량의 감소를 의미했다.

▲ 당시 우리나라 어촌 : 부산항 용당포

가뜩이나 당시 일본의 어선은
한국의 어선보다 발달된 장비를 동원해서

한국 연안에 출몰하여, 어자원을 남획 하고 있어서 
정부로서는 꽤나 골치를 썩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어선들은 대부분 무동력선이었지만,
일본의 어선은 동력을 장착하고 있었음."

정부는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1952년 4월부터 
샌프란스스코 조약이 발효가 되기 때문이다.




그전에 수를 써야만 했다.




결국 이승만은 특유의 '밀어붙이기식 방법'으로 선수쳤다.
바로 이승만 라인의 선포였다.


'밀어붙이기식 방법'은 이승만의 전매특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주도하면서,

국회의원 50여명을 버스 통째로 강제로 끌어갔던 것이나



1953년 반공포로들을 예고도 없이 풀어주면서, 

국제적인 이슈를 낳게했던 것이나



모두가 이승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이승만은 다짜고짜 바다에 선을 그었다.




그리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한민국의 수자원 보호를 위해서
경계선을 선언합네다."

 이승만
"앞으로 수역 안에서 어업활동을 하려면
국적여하를 불문하고 한국정부에 허가를 받아야 합네다."

 이승만
"이를 위반하면 처벌을 받게 될겁네다."

그러자 일본은 쌍불을 키며 항의했다.



"공해에 국가 주권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전례는 없으무네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반박했다.



"자국의 수자원 보호를 위해 경제수역을 선포한 사례는
미국(1945), 아르헨티나(1946), 칠레(1947) 등등 여러 나라들이 있삼."

그러자 난감해진 것은 미국이었다.

처음에는 만류했다.

"한국 그러면 안 돼~ 이건 조약 위반이야."

하지만 생각해보니,
한국을 자극해서도 안될 것만 같았다.



"그깟 작은 섬, 한국한테 주지 뭘.
그것 땜에 이승만이 삐쳐서 휴전협정에 조인 안 해주면,
굉장히 골치 아파진다능."

결국 미국은 수수방관하며,
묵시적으로 한국에 손을 들어줬다.


● 불법 조업 어선 나포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 이후,
일본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 이승만 라인에 시위하는 일본인들



"누구 맘대로 선을 긋는 것이냐?"

근대적인 장비를 갖춘 일본어선은
보란 듯이 평화선을 침범해 고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52년 10월부터 
불법 조업 어선을 나포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싹 다 잡아들여! 도망가면 발포해도 좋음!"

그러자 수많은 일본 어선들이 붙잡혔다.
개중에는 적대국이었던, 중국 어선들도 있었다.



"스미마셍! 모르고 넘어왔스무니다."



"울리싸람, 평화선 그런 거 몰랐다해!" ☞ 



그리고 나포된 어민들은
부산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 수가 천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1958년 1월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 


또 나포한 일본 배들은 성능이 좋았기 때문에
해안경비정으로 쓰기도 했다.

 


"굳 잡!"

하지만 도망가는 도중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러길래 넘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이에 일본은 보복조치로 맞대응했다.


"앞으로 어로장비의 한국 수출을 금지한다능!"



"한국 해산물의 수입도 전면 금지한다능!"

그리고 이런 대치국면은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가 되긴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때까지 한국 해경에게 일본은,
328척의 배와 4천여 명의 선원들이 나포·억류되게 된다. ☞ 참고



독도밀약과 후폭풍

● 독도를 차라리 폭파시키자!

이승만의 평화선은 일방적인 결정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는 인정을 받지는 못 했다.


또 한일 양국 간 첨예한 갈등을 낳게 했다.

그런데 1960년 이승만은
부정선거의 여파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자 대립 일색으로 가던
한일 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예견되고 있었다.



"이제야 한일 관계에 숨통이 트이려나?"

미국은 재빨리 새 정부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권고했다.



"중국과 소련에 대항해서
동아시아의 안보체제를 강화하려면.."
  



"무엇보다 한미일 공조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가 선행되어야 함." 

때문에 새 정부에 여러 당근책을 제시했었다.



"새 정부를 지지해 주겠삼. 경제도 원조해주고,
우리가 바라는 건, 한일 양국의 관계 개선임."

일본 역시 한일국교 정상화는
자국의 안보와 경제를 위해서도 매우 필요했다.




이는 우리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 확보가 절실한 때였다. 



"그보다 공화당 창당 자금이 
더 절실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때문에 군사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암암리에 일본과 접촉을 하고 있었고

▲ 61년 11월 비밀리에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또 일본 기업들로부터 
비밀리에 막대한 자금을 받고 있었다. ☞ 출처



물론 일본이 공짜로 돈을 줄리는 없었다.

일본은 돈을 준 대가로
독도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다.

62년 2월 고사카 젠타로 일본 외상은 이렇게 압박했다.


 고사카 젠타로
"독도는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스무니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테니, 한국도 응소하기 바라무니다."

그런가 하면 62년 3월에는 이런 협박까지 했다.


 고사카 젠타로
"독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교정상화는 무의미하무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진땀을 흘렸다.

 김종필
"한일회담과 독도문제는 별개 문제입니다."

 김종필
"이 문제는 국교정상화 후에
시간을 가지고 해결해봅시다."

급기야 일본은 독도 폭파론까지 들고 나왔다. ☞ 출처




1962년 9월 한일회담에서 
이세키 유지로 국장이 말했다. 


 이세키 유지로
"독도는 쓸모없는 섬이무니다.
크기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그냥 폭발해버리면 후환도 없게 될 것이무니다."

그런데 이걸 한국도 동조하고 나섰다.

1962년 11월 김종필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김종필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 

 김종필
"일본에 빼앗길 바에
차라리 폭파해버리는게 나은 것 아닌가!" ☞ 출처


● 독도밀약 (65년 1월)

1961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은
4년 넘게 국민들의 엄청난 저항을 받았지만



결국 1965년 6월, 
한일협정이 체결되게 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1965년 1월 
독도에 관한 문제가 정리되었다.

이를 두고, 
흔히 독도 밀약이라고 한다. ☞ 출처




사건은 이러했다.

1965년 1월 정일권 국무총리와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서울의 모처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이곳에서 독도 문제의 
모든 앙금을 해소시켜볼 요량이었다.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는 박정희의 재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곧 박정희의 말이었다.


 우노 소스케
"자 그럼, 다케시마 문제를 해결해봅시다."


 정일권
"먼저 조건이 있습니다."


 우노 소스케
"뭔데 그러시무니까?"


 정일권
"앞으로 일본은 한국만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해 주세요."
(5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재일교포의 북송 문제로 큰 소동이 있었다)


 우노 소스케
"하이! 그런 거라면 문제없스무니다."


 정일권
"또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대주셔야 합니다.."


 우노 소스케
"하이! 그건 이미 약속드린 일이무니다."


 정일권
"그럼, 좋습니다."

그리하여 4개 부속조항으로 구성된
독도 밀약이 탄생하게 된다. ☞ 출처

내용은 이러했다.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고,

여기에 양국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은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여 선을 그을 수 있으며,

이때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아간다.

 
● 한일어업협정 (98년 10월)

박정희 정부의 독도밀약은
이후 30년 넘게 큰 문제없이 잘 지켜져왔다.

그런데 1994년 UN에서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해양법을 공표했다.



"앞으로 경제수역은 
12해리에서 200해리로 확대된다능!"

그러자 그동안 잠잠했던 문제가 
급격히 외부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곧 ↓이러한 EEZ를 발표했다.
그간의 독도밀약 내용을 보자면,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 대다수는 전부 놀랬다.
'독도밀약'이라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한 국민들이었다.



"이런 날강도 같은 X들!"

여기에 일본은 
EEZ를 침범한 한국 어선들을 나포해가기 시작했다.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한국 정부도 강경책으로 맞대응했다. 

1997년 독도에 새 접안시설을 건설하는 동시에
우리 또한 우리가 발표한 EEZ를 넘는 일본 어선들을 나포해갔다.



▲ 1997년 독도 접안시설 공사

일본은 강력히 비난했다.
97년 10월에는 새로운 어업협정을 할 것을 요구했다. ☞ 참고



"다케시마의 시설물을 철거하고, 어업협정을 새로 하자!"

그런데,
때마침 IMF 사태가 터졌다.

정권도 교체되어 시국이 어수선했다.

이럴 때 일본의 자금이 절실했다.



"우리가 도와줄까?"




"그래 준다면 땡큐지."



"맨입으로?"

결국 1998년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게 된다.




이때 우리 국민들은 독도 주변이 
'중간수역'으로 놓인 걸 확인하게 된다. ☞ 참고




그리고 크게 분노했다.

1965년도에 독도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당최 모르고 있었으니,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독도는 명확한 한국의 영토인데, 
공동수역이라니 무슨 말이냐!"



"왜 독도를 기점으로 EEZ를 긋지 않고,
울릉도를 기점으로 EEZ를 긋는 것이냐!"



"일부라도 내어주게 된다면,
향후 영유권 문제에 불씨가 될 것이라능!"

반응이 들끓었고, 
당시 어민들은 헌법 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말을 하며 안심시켰다.



"어업협정은 어업과 관련된 분야만을 지칭하지,
영토권을 침해한 것이 아님요!"

그리고 이때 체결된 어업협정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협정의 만료일을 3년으로 정했기 때문에
일방의 의지만으로 어업협정은 파기가 가능하지만.."

최근에는 독도 시설물 증축 문제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결국 우리 정부가 철회를 외치며
한 발짝 물러서야만 했지만,

이때도 역시 우리 국민들은 
영문도 제대로 모르고 분통을 터뜨려야만 했었다.

출처 - http://blog.naver.com/alsn76/2202359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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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류기가 주는 교훈

● 바다를 버린 조선

토인비는 말했다.

토인비

"국가의 멸망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분열로부터 시작된다."

맹자도 말했다.

맹자

"민심을 배반한 군주는 
하늘의 뜻으로 응징을 당한다."

결국 한 나라가 멸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를 꼽자면..

'내부 모순'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게
동서양 석학들의 공통적인 생각인 것이다.





조선시대를 상기해보자.

여러가지 내부 모순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는 이런 것도 있었다.

바다를 버렸다.



사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국가 방위 개념에
바다를 지킨다는 것이 없었다.

왜구나 서양 오랑캐의 
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고의적으로 해안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밤이면 해안에서 불빛을 보여서는 안되었으며,
섬에서는 모든 주민을 철수시키는
이른바 공도(空島: 섬을 비우다)정책을 썼다.



그런가하면 일본의 침략을 뻔히 예상하고도

이순신은 배를 완공하지 못하고
조립 직전까지만 준비해 두었다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첩보를 받고서야
급하게 조립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서야 
거북선의 시운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 정말, 이순신 장군 없었으면
조선은 200년 역사로 끝날뻔.."

사실 이런 공도정책은 따지고 보면 
중국의 해금정책을 고스란히 따라한 것이었다.

14세기 중엽 이후 중국의 해안가는
쉴새 없는 왜구들의 침입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뤄야만 했다.

이때 명나라가 선택한 조치는
극단적이었다.


 주원장
"아예 해안가 마을을 텅텅 비워버려서
해적들이 훔쳐갈게 하나도 없게 만들어라."


 주원장
"어차피, 중국은 땅덩이 커.
지금 북쪽 오랑캐 막기도 벅찬데
바닷가 해적들 신경쓸 새가 없다능."

이랬던 것이다.

그런데 3면이 바다인데다, 
국토도 좁은 조선이 그걸 보더니
고스란히 따라한 것이었다.


 
"무조건 중국꺼 따라하면 장땡이구나."


● 하멜의 표류 

때는 1653년 8월 15일 밤이었다.

제주도 모슬포 앞바다에 
한 척의 이양선이 난파되었다.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멜 일행의 표류였다. 


워낙 폭풍이 심했던지라 
선원 64명 중 28명이 현장에서 익사하고
36명만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해안가에 올라왔다.




날이 밝자 섬 주민들은 그들을 발견하고
관아에 신고를 했으니,

포졸들이 당도하자 
네덜란드 선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가사키, 나가사키"

자기들이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가려다가
난파한 선원들임을 알렸던 것이다.

하지만 현감은 막무가내로 선원들을 체포했고
달아나지 못하게 목에다 방울을 달았다.

이때 관헌과 주민들은 해안에 표착한
이양선의 유류품들을 약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곧 제주 목사에게 끌려갔다.

목사는 이들 이방인에게 
친절하게 호의를 베푸는 한편

파발을 띄워, 
어떻게 이들을 처리해야하는지
조정에 문의를 했다.


 
그렇잖아도 당시 조정에서는 
나선정벌(1651년)을 통해


서양 오랑캐들의 화포술을 익히 알고 있었다.







 
"오랑캐들을 한양으로 데리고 와서 
화포를 만들게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효종
"그런게 좋겠구나. 
듣자하니 이넘들이 화포 만드는 재주가 비상하다고 하니.."

그런 사이에 하멜 일행은 
몰래 배를 훔쳐서 탈주를 감행했다.




하지만 곧바로 붙잡히고 말았다.
동네방네 개들이 짖어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조선 개들은 왜 이렇게 냄새를 잘 맡은거임?
유럽개들은 상대도 안되겠네.."



"훔쳤어도 우리는 물귀신됐어.
저런 허술한 배로 
어떻게 나가사키까지 갈 수 있단 말임."

그렇게 네덜란드인들은 조선의 배를 보더니
마음을 접게 된다.

그리고 곧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 노리개가 된 근대문명

한양으로 올라 온 뒤로 네덜란드인들은 
당최 할 일이 없었다.

화포를 만드는 일은,
청나라 눈치가 보여서 곧 단념 하고 만다.

사실 북벌을 주장하던 
효종 자신 조차도 

북벌은 왕권 강화를 위한 구실에 불과했었지,
절실한 마음은 애초에도 없었다.



 

효종

"나도 한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있었다고.
직접 보고 느끼고 왔던게 나임.

효종

"누구보다 걔들을 잘 아는데
우리가 뭔 수로 싸워서 이김?"

그런 와중에, 
청나라 사신이라도 도착하는 날이면

사신단의 눈을 피하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단체로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네덜란드인들이 조선을 위해서 하는 일이란
겨우 광대놀이에 불과했다.




고관 대작의 집에 불려 들어가 그들은
서양의 춤과 괴성 같은 노래를 들려줌으로써
사대부들을 즐겁게 해줬다.


"이넘들 참으로 웃기게 생겼네.
코는 튀어나오고, 머리는 누렇고,
피부는 허옇고, 눈은 파랗고..ㅋㅋ"

그들은 동물원의 구경거리에 가까웠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가지고 왔던
총포와 도검들은 녹여서 
농기구를 만드는데 보태졌다.

그나마 군인이 되어 
밥값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네덜란드인들의 기대는 

그야말로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 곤장을 맞는 조선의 네덜란드인들

결국 네덜란드 인들은 
멀리 남쪽 지방으로 귀양가게 된다.




"오랑캐들 데리고 있어봐야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괜히 나중에 청나라 사신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뒷일만 골치 아파짐."

그리고 남쪽으로 강제 이송된 네덜란드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거지나 다름없는 생활로
유리걸식을 하게 된다.

절간을 찾아가 스님들의 보시로 연명하는가 하면
구걸을 하고 품팔이를 했다.


▲ 작업하는 조선의 네덜란드인들 

그러는 사이 14명이 죽고 22명만이 남았다.

그리고 이들은 수년간 모은 돈으로
겨우 배를 한 척 마련하고
그걸 타고 나가사키로 탈출하게 된다.



● 일본이 조선과 다른 점 

하지만 일본은 조선과 달랐다.

1543년 포르투갈의 상선은
태풍을 만나 일본 규슈섬 남쪽, 
다네가시마에 표류하게 된다. 

당시 일본인들을 포르투갈 선원들을
우호적으로 대하면서

향후 정기적인 교류를 약속하며
일행들을 무사히 돌려보내줬다.


▲ 16세기 일본에 정박한 포르투갈 선박


이유는 이러했다.

당시 일본은 절실했다.

중국에서는 미운털을 박혀서 
무역의 길이 막혀 있었고
조선은 일본인들을 얕잡아 보고 무시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인들과 마주친
이방인, 포르투갈인들은

한낱 미개한 오랑캐가 아닌,
새로운 교역의 대상이자 탈출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받은
조총 두 자루를 노리개 정도로 치부하지 않았다.

뜯어보고 분해해보면서
성능을 실감하고, 
곧 유사하게 만들어냈다.

그러다 불과 40년 뒤에는
전세계 조총의 절반 가량을 
일본 혼자서 보유하기에 이른다.


 

조총의 기술 뿐만 아니었다.

곧 네덜란드인들과도 교류를 실시하여
조선술과 항해술, 의술도 배워
이른바 '난학'이라는 독특한 학문 체계를 완성했고,


















▲ 서양의술의 보급


이것이 근대 일본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으며,
곧 조선 침략의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반면에 조선은 어떠했는가?

지배층의 확고부동한 성리학 세계관은

서양은 어쩌다 화포술 재주만 갖춘 
미개한 오랑캐에 불과했다.



"지금 중국이 가장 예뻐하는 
신하국 1순위가 우리 조선임.
고로 조선은 세계 2인자.^^

뭐하러 미개한 오랑캐 문명에 관심을 가지나."

이러한 논리로 일관하였기에 
19세기 서세동점(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의 시기에도 
조선은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이양선의 출몰과 쇄국정책

● 나폴레옹이 만난 조선

때는 1817년 초, 아프리카 서남쪽 육지에서
2천km나 떨어진 절해고도, 세인트헬레나 섬이다.




이곳에 영국인 선장 배질 홀은
유배 중인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 섬에 들렸다.

그는 비록 영국인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파리에 유학하던 시절,
나폴레옹의 가장 아끼던 후배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안부인사도 드릴겸
나폴레옹을 만났던 것이다.

 

나폴레옹

"오! 그래, 반갑네. 아버지는 잘 계시고."

배질 홀

"잘 계십니다."

나폴레옹

"어딜 갔다 돌아오는 길인가?"

배질 홀

"아시아 동쪽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들렸다 오는 길입니다."

나폴레옹

"거긴 왜?"

배질 홀

"황금이 많다는 정보가 있어서요."

나폴레옹

"황금이 많던가?"

배질 홀

"아직 조사만 슬쩍 하고 왔습니다.
이것이 그곳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홀 선장은 조선의 모습을 스케치한
그림을 보여줬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경탄했다.

나폴레옹

"캬~ 저게 담뱃대란 말이지?
헐, 굉장한데.."

 

나폴레옹

"그건 그렇고, 그곳 사람들은 어떻던가?"

 

배질 홀

"상당히 순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척이나 평화스러운 걸 좋아해서

유서가 굉장히 깊은 나라인데도
아직까지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나폴레옹

"과연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한반도 쳐들어가 보지 않은 민족이 있을까?

내가 다시 천하를 통일하면
그때 반드시 꼭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가보지."

하지만 그런 나폴레옹의 바람과는 달리
4년 후 그는 섬에서 죽고 만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지만
어쨌든 시대를 풍미한 천하의 호걸, 나폴레옹도 


조선의 길다란 곰방대를 보며 놀랬고,
조선의 평화정책을 보며 의아해했다.




● 조선은 황금의 나라?

사실 19세기 초에는 
요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연원을 보면, 18세기 초 
조선에는 한번도 와 본 적도 없는
프랑스의 뒤 알드라는 선교사가

청나라에서 줏어들은 얘기로 책을 출간하여 
서양에 소개했던게 시초였다.

그의 책 내용은 이렇다.

뒤 알드

"조선은 중국의 변방에 위치한 속국으로서,
원래 중국인 기자가 세운 나라였다.

사람들은 인종적으로 남방계와 북방계의 혼혈인데
북쪽에 사는 사람들이 더 건장하고 호전적이다."

 

뒤 알드

"이들은 평소 음악을 즐기고
예의와 효도를 중시한다.

법의 기강이 엄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립문을 닫지 않고 살아도 좋을 만큼
도둑이 없는 나라다."

 

뒤 알드

"이 나라는 모피와 종이가 우수하고
유약이 발달되어 도자기가 아름답다.

무엇보다 금이 풍부하여
심지어 옷의 장식까지 죄다 금으로 치장하고 있다.
특히 이런 금은 부장품으로 함게 매장된다."




이렇게 썼으니.. 
가뜩이나 약탈심으로 가득찬 서구의 모험가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오! 동방에도 저런 엘도라도가 있었단 말이지!"

때문에 19세기 초부터 서구 국가들은
저마다 조선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특히 서해안은 그들이 침략을 발판으로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다.

대략 미국은 인천만을 중시했고
독일은 아산만, 영국은 옹진반도 일대를 타겟으로 삼았다.





그런 때에 홀 선장은 
1816년 9월 서해안에 상륙하고
그 일대를 탐사했던 것이다.


● 조선인들은 외국인에 우호적이었다

홀 선장 일행이 충청도 비안만에 상륙하자
주민들이 다가오더니 

제일 먼저 표시한 의사는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이었다.



함부로 이방인들을 상륙시켰다가는
주민들의 목이 달아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홀 일행은
주민들이 막아서는 것을 뿌리치고
기어코 마을로 들어섰다.

홀 선장은 그곳에서 
자신들이 가진 물건과
조선의 토산품을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주민들은 특히 시계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 당시 서양인들이 그린 조선인들의 모습

이어 관아에서 신고를 받고 
관리들이 도착했다.

조선의 관리들은 
두려움과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그러자 홀 선장 일행은 관리들을
자신의 배로 초대하며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배질 홀

"인간사가 다 그렇지
서먹함을 푸는데 술보다 좋은게 어딨겠어."

그렇게 호의를 받게되자
그제서야 조선 관원들의 긴장은 완화됐다.

하지만 조선 관원들과 홀 선장 일행은
당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비인 현감


그저 손짓 발짓만으로 
대충 의사소통을 할 따름이었다.

그럴때 관원 일행 중 하나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다.

그러자 홀 선장은 급히 군의관을 호출하여
응급처치를 하게 하였으니,
신기하게도 말짱히 나았다.




처음으로 서양 문물의 경이로움을
직접 몸소 체험하게 된 순간이었다!

비인 현감

"거참 신통하기도 하지.."

이후로 홀 선장과 관원 일행은 
급속도로 친밀해졌다.

현감이 단도에 관심을 보이자 
선장을 이를 기꺼이 선사했는가 하면,

다른 여러 가지 선물도 
아낌없이 퍼줬다.





현감이 대포의 시범 발사를 요구하자
함포를 낮게 조준하여 
발사를 해보이기까지 했다.

 

배질 홀

"황금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까짓것."

그리고 이틀이 흘러 
홀 선장은 육지를 상륙하고 싶다는 
의지를 간곡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현감은 
연신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몹시도 난감해했다.


 비인 현감

"아이고 속터져. 안된데도 그러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 일행이 막무가내로 상륙하자

현감은 눈물을 흘리며 앞장을 섰다.



"아놔, 이러면 내가 제명에 못사는데. ㅠㅠ"

심지어 옆에서 시중을 들던 아전까지 
모두 큰 소리로 울었다.

그들은 말끝마다 손으로 목을 쳤으며,
이틀 씩이나 재워줬으니 
이제 자신들은 죽은 목숨임을 강조했다.




때문에 홀 일행은 
재빨리 지질조사를 마치며
본국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 서양 도굴범과 더욱 강력해지는 쇄국정책

18세기 중엽이 되면 사양인들은
현지인들의 저항 때문에 
지질 조사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보다 쉽고 빠른 방법으로
무덤 도굴을 생각하게 된다.



"황금의 나라 조선에 대한 글에서 보면
수많은 황금들이 부장품으로 
매장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음?"


"옳지. 그걸 노리는거야.
이왕이면 커다란 무덤을 파보는거야."

때문에 당시 서양인들에게 
왕릉은 약탈의 1순위로 떠오르게 된다.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다.


▲ 남연군 묘

오페르트

"듣자하니, 흥선대원군 이 사람이
그리도 천주교인들을 못살게 굴었다지?

잘됐네. 나중에 변명거리도 될 수 있고.."

그랬는데 오페르트는 뜻대로 안된다.




오페르트

"아놔, 왜 이렇게 묘지 안이 단단함?
삽질 가지곤 어림도 없겠네."

결국 포기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대원군의 쇄국정책만 더욱 확고해진다.

사실 이보다 2년 앞서 있었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도


겉으로 구실은 천주교인의 박해에 대한
보복에 있었다지만, 

진짜 목적은 평양의 왕릉을 
도굴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8세기 초, 
한번도 조선 땅에 와보지도 않고

줏어들은 얘기만으로 견문록을 썼던
한 프랑스 신부 때문에
 

뒤 알드

서구인들은 저마다 낚여서 
황금을 얻기 위해 
그렇게도 무리하게 도발했던 것이고,

그에 따른 반발로, 
조선 지배층들의 쇄국정책 입지만 
더욱 확고해졌던 것이다.


때문에 이양선이 출몰한 이후로
조선은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금의 채광을 
법으로 금지하는가 하면

서양인들의 약탈심을 유발시키지 않도록
해안가 섬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소위 '공도 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그 결과 조선은 
모든 해상권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압권이었던 사건은 
1875년 운요호사건이었다.

운요호가 부산과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조선 사람들은 뱃전에 보이는 
거대한 대포를 보고는 겁에 질렸지만

실은 그 대포는 실물이 아닌 그림이었다.



그래서 정체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일본 해군은 해안에서 멀찌가니 떨어져
조선의 포대를 위협했던 것이다.



울릉도의 공도정책

● 태종의 공도정책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를 점령한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당시 사료 기록은 이렇다.

 

지증왕

"듣자하니 우산국 사람들은 사납지만 
우둔하다고 하는데, 무슨 묘안이 없을꼬?"

이사부

"사자 모형을 만들어서 겁을 주면
스스로 항복할겁니다."

그랬는데 과연 그랬다.


하지만 이후로 울릉도는 스리슬쩍 다시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이뤘고,

고려 왕조가 세워지자 
고려에 조공을 바치면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11세기 경
여진족 해적들이 대거 울릉도로 쳐들어오자
울릉도는 쑥대밭이 되었고,


▲ 여진족은 흔히 기마민족으로 알려졌지만, 해양활동도 활발했다.

이때 많은 울릉도 유민들이 
고려 땅으로 피신해 오게 되었다.

울릉도민

"살려주삼"

그 뒤로 여진족의 금나라가 망하자,
유민들은 다시 울릉도로 돌아가게 됐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울릉도는 고려의 영토로 복속되게 되었다.

또 고려 후기가 되면, 
권문세족의 수탈이 날로 심해지자

많은 고려 백성들이 세금과 병역을 피하기 위해 
울릉도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되었다.

당시에는 왜구의 출현으로 나라의 근심이 깊었다.



"전하, 근자에 왜구들이 
울릉도를 약탈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태종

"어허, 그넘들이 그런 외딴섬까지 쳐들어갔단 말인가?
벼룩에 간을 빼먹을 넘들이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사옵니다."

태종

"뭔데?"


"울릉도 주민들이 
왜구와 결탁하여 해적질을 돕게 된다면
엄청난 화근이 될겁니다."

 

태종

"그렇구나. 근자에도 우리 백성들이
왜구를 사칭한 가왜(假倭)를 조직해서

해안마을을 도륙질하는 경우가 있다던데,
분명 그리 될 수도 있겠어." ☞ 참고



"그래서 말인데, 이들 울릉도 주민들을
죄다 육지로 이주시키고 

앞으로 울릉도를 
무인도로 만드시는건 어떨런지요."

 

태종

"옳거니. 그리하라!"

그렇게 해서 조선시대에 울릉도에는
'공도정책'이 실시되게 된다.


● 어부 안용복, 울릉도를 찾아오다

이후로 울릉도는 공식적으로 무인도가 되었다. ☞ 참고



"이건 마치 도둑이 무서워서 
살던 집을 버리고 간 격인데."



"그러게, 신라 장군 이사부 때의 
그런 패기들은 다 어디 가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섬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17세기 초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울릉도를 찾은 사람들이 몇몇 있었으나 
이미 들어와 살고 있던 왜인들에게 
곧 내쫓기게 되어 정착할 수가 없었다."

"현재 울릉도는 완전히 
왜인들에 의해 점령되어버렸다" 

아예 일본 막부에서
일본인들에게 울릉도의 삼림채벌권과
조업권을 내어주는 일까지 발생했다.


 
"아놔, 공도정책인지 뭔지 하는 바람에
완전 일본 땅 다 됐네!"

그랬다. 

만약 안용복이라는 어부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현재 울릉도는 
일본 땅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때는 1693년(숙종 19년)의 일이다.

안용복은 울산 출신의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

안용복


그런데 울릉도에 도착해보니
이미 많은 일본 어부들이 있었고
그들은 조업권을 두고 조선 어부들에게 항의했다.

참고로 부산 태생 안용복은 어렸을 적부터 
초량왜관에서 뱃사공으로 일을 해서
일본말에 능통했다.


안용복

"봐라! 문디자슥들,
느그 왜 남의 땅에 와서 고기잡고 있노?"


"무슨 소리하무니까! 
이 섬은 일본의 영토무니다!"

이렇게 실랑이가 오가는 가운데
결국 일대 육박전이 벌어졌고,



결국 쪽수에서 진 조선 어부들 중 
안용복과 박어둔은 함께 돗토리현 호키라는 곳으로 
인질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인질이 된 안용복은 
호키 태수에게 강력 호소했다.


안용복

"마, 보소! 조선사람이 조선땅에 
들어간건데 우예 그럽니꺼?"

호키 태수

"정말 거기가 니들 땅임?
막부에 물어볼테니깐 잠깐만 기둘려."

호키 태수

"만약 뻥이기만 해봐라.."

이랬는데.. 
곧 막부에서 전갈이 왔다.

호키 태수

"어라? 울릉도 땅이 니들땅 맞았구나."

왜 이리도 일본은 순순히 물러난 것일까?

사실 당시 일본 막부에서는 
설마 조선이 울릉도 같은 섬에 신경이나 쓸까 싶었는데

다짜고짜 울릉도 얘기가 나오니,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쇼군

"요즘 조선과는 사이가 좋아져서
그동안 군사적 위협도 많이 줄였는데

괜히 이런거 가지고 
분란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그래서 호키 태수는 
안용복 일행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준다.

호키 태수

"미안, 내가 부산까지 데려다 줄게."

그렇게 9개월만에 조선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 어부 안용복, 상은 커녕 벌을 받다

귀국한 안용복에게 
돌아오는 조치는 황당했다.


"그간 어떤 정치인도 못한 일을 네가 해냈구나."

라고 포상을 주지 못할 망정

곤장 100대를 쳤다.


동래부사

"아니, 이넘들이 감히 국경을 넘어갔어?"

그리고 안용복의 일은 
곧 조정으로 장계가 올려졌다.

숙종

"소식을 듣자하니, 근자에 울릉도에 
왜인들이 난립하고 있다는데."

신하

"그런 일이 있었는지 꿈에도 몰랐는데
참으로 황당한 일이옵니다."

즉 안용복 때문에 
그제사야 조선의 정치인들은

그동안 영토의식이 희박했던
울릉도라는 섬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신하

"앞으로 왜인들의 불법 채집과 조업을 못하게 
막아야 하옵니다."

숙종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리고 일본 막부는 공식적으로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게 된다.

쇼군

"앞으로 우리 어민들이 
그쪽으로 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말 뿐이었다.

조선 정부 역시 
그걸 확인할 방법이 묘연했다.

그랬는데 이번에도 안용복이 나섰다.

때는 1696년 3월이었다.

안용복이 이끈 조선 어민 160여명은 
다시 울릉도 일대에서 고기잡이를 하러 갔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역시나 일본 어민들이 와있었다.



"저것들이, 누굴 핫바지로 보나."

빡친 안용복은 정식으로 찾아가 따져보기로 한다.


 
"마, 아서라. 
니 그라다 걸리면 또 디지게 맞는다."

 

안용복

"마 개안타.
내사마 분한건 몬 참는다."

그렇게 안용복은 정식으로 따지기 위해 관복을 입고
조선 관리로 위장해서 호키 주로 찾아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조선 관리가 아님이 들통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조선으로 송환되고 만다.

동래부사

"상것 주제에 양반의 흉내를 내는 것도 모자라서
감히 불법으로 월경을 해?"

안용복은 다시 곤장 100대를 맞고
끝내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유배형에 처해진 뒤로 
그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다.


● 겨우 찾아온 울릉도

그 후로도 200년 동안 
조선은 끝까지 공도정책을 고수하게 된다.

물론 그 사이에 
일본 어민들이 제집처럼 들어와 

삼림을 베어가고,
어자원을 쓸어갔던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울릉도를 인식하게 된 것은
열강들의 영토침략이 본격 가동된
19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1882년 고종은 무관 이규원을 불렀다.

고종

"생각해보니 울릉도가 걱정일세.
거기가 요즘 어떤지 함 조사해보도록.."

이규원

"넵."

그렇게해서 이규원은 
울릉도 일대를 조사하게 되었다.

고종

"그래, 가보니 어떻던가!"

이규원

"큰일이옵니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곧 일본에 빼앗길듯 싶습니다."

 

고종

"아니, 어떻길래?"

 

이규원

"지금 섬에서는 
일본인 수백명이 산림을 무단으로 벌채하고 있고
인근의 물고기를 싹쓸이 하고 있습니다."

 

이규원

"또 아예 섬 내부에는
일본국 송도(松島)라는 팻말까지 세워져 있었습니다."

 

고종

"정말 큰일이구나."

이렇게 영토 침탈의 위기의식을 느낀 고종은
부랴부랴 대책을 세웠다.

고종

"울릉도에 살 사람들을 모집해서
그곳에 앞으로 살도록 하게하라."

이때가 1884년이었으니
어언 468년간 이어져온 
조선의 공도정책이 폐지되는 순간이었다.


▲ 울릉도 초기 개척민의 집 (1884년)

한편 19세기 말이 되면
조선은 대대적으로 서양 열강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이때 엘도라도의 꿈을 위해
많은 서양 광산업자들이 조선 땅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곧 그들은 소문이 과장된 것임을 깨달았고
서서히 조선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던 것.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은
결국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묵시적 방조자가 되도록 만든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진짜로 금이 넘쳤어봐. 
일본이 조선을 먹게 그냥 내버려뒀겠음?"

결국 조선은 바다를 버렸기 때문에
근대 문명과 제대로 교류할 수가 없었고,

내부적으로는 소중한 영토와 영해를
크게 날려먹을 뻔했고,

또 결국엔 나라를 잃어버리게 됐다.

 

 

참고 문헌 :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읽기 (신복룡), 세상사람의 조선여행 (규장각), 조선왕조실록




출처 - http://blog.naver.com/alsn76



결국엔 안용복이 지킨 땅도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라는 사실....ㄷㄷ


이걸 보면 일본이 왜 무인도였던 독도를 자신들의 섬으로 편입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는 무인도엿으니 그들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만은 볼 수 없는 조선의 뻘짓입니다.



아..지금의 대한민국과 조선과 별 다를바 못느끼는 것은 저만 그런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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